둥세근상 :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처럼 세상을 보는 방법

노한솔展 / NOHHANSOL / 盧한솔 / painting   2022_0615 ▶ 2022_0630

노한솔_둥근세상_장지에 먹, 스프레이_53×65.1cm_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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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01:00pm~08:00pm

별관 outhouse.seoul 서울 마포구 망원로 74(망원동 414-62번지) 2층 outhouse.kr facebook.com/outhouse.info instagram.com/outhouse.seoul

球: 면할 수 없이, 직면하는 관계에서 이미지와 의미가 돌아가는=작동한다는 것 굴러가는 눈덩이는 처음에 사실 눈덩이가 아니었다. 눈송이는 우리 손에서, 손을 통해서 형태를 부여받고 부피와 무게를 갖게 된다. 작은 눈덩이를 언덕 밑으로 굴려 보낼 때, 크기는 점점 커지면서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간다. 자갈 같은 이물질이 여기저기 붙고 구(球)가 된 눈덩이는 지나간 자리에 오목한 길을 만든다. 여기까지, 이 과정은 굉장히 감각적이며 촉각적이다. (그런데) 소리를 빨아들이고 시야를 하얗게 덮은 이곳에서 우리의 감각 기관은 수축한다. 만져보고 굴려보고, 오목하거나 볼록하거나 알아보는 과정은 비-시각적이다. 그렇다고 촉각이라는 감각만이 유일하게 선예해진다고 단정할 수 없다. 촉각의 비-시각적인 성격은 오히려 비유를 풍부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비유는 풍부함이 이미 조건 지어져 있다. "무엇을 닮았다"라는 표현이 원본과 복사본, 편집본, 가공본의 종속 관계를 드러내는 대신, "무엇과 같다"라는 말이 그렇듯이, 비유는 동일시의 관계를 내포하는데 그것은 비-시각에 근거하여 창출된다.

노한솔_솟아난 틈_장지에 먹, 스프레이, 콜라주_45.5×37.9cm_2021

원본과 복사본 (기타 등등)의 관계로 본다면, 이번 전시 서문에 눈이 내린 언덕을 언급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작가가 그린 작품에 눈이 내린 언덕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동시에 촉각을 온갖 경험의 대변자로서 세워놓는 것 또한 적절하지 않다. 작품을 만져볼 수 있게 작가가 안내하지 않기 때문이다. 시각 작업을 하는 작가가 이번 전시에서 주목하는 것은 이미지와 의미의 관계, 더 정확히 말하면 이미지와 의미가 작동하는 방식이다. 이미지 하나에 달라붙은 의미가 어떻게 변하고 하나의 의미(하는 바)를 어떤 이미지로/로서 받아들이는지, 그것은 마치 눈덩이와 같이 하얀 평면을 돌아간다=작동한다. 눈덩이가 처음에는 눈송이였던 것처럼, 우리가 구를 보거나 표현할 때, 사실은 하나의 점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을 잊어버린다. 점은 선을 그려나가면서 밝고 어둠을 묘사하여 평면에 부피와 무게를 부여한다. 비록 평면상에서 납작해보일지라도, 비록 그 출발'점'이 작고 잘 보이지 않더라도, 점은 구와 같이, 어디로 굴러갈지 모르는, 어느 부분이 밝아지고 어두워질지 모르는, 움직임의 형태를 내적으로 지닌다.

노한솔_벌어지는 틈_장지에 먹, 스프레이_42×29.5cm_2021
노한솔_손에 손잡고_장지에 먹, 콜라주_17.9×25.8cm_2022

이번 전시에서 작가가 선보이는 작품은 두 가지 있다. 하나는 '눈이 보이는 사람들' 시리즈다. 문장을 구성하는 글자 배열이 앞뒤로 바뀌거나 이미지에 덧붙여진 문장이 그 이미지를 설명해주는 일련의 작품은 의미가 이미지로/로서 인식되는 점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둥근세상」이라는 제목의 작품은 화면에 '둥세근상'이라고 표현되어 있다. '둥근세상'이 '둥세근상'이 될 때, 우리는 차이를 인식하면서 동시에 의미를 이해하는데, 그 인식을 잘못으로 따지지 않는다. 이른바 '단어 우월 효과' 때문에 문자 순서가 바뀐 경우에도 그 뜻은 전달된다. '둥근 세상', '주차금지', '입춘대길'이라는 문구는 우리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데, 문장보다 메시지를 담은 이미지로 보고 수용된다. 어디서든 볼 수 있는 이미지-의미는 오히려 특정/고정된 메시지라는 명확한 위치를 부여받았기 때문에 앞뒤 문자 배열이 바뀌어도 충분히 그 의미를 상실하지 않고 보유할 수 있다. 문구가 처음부터 들어간 대상을 그리는 작업이 있는 한편, 「손에 손잡고」에서 이미지는 임의의 문장과 만난다. 이 작업에서 자막처럼 작품을 수식하는 말은 앞서 본 '둥근 세상'이나 '입춘대길'만큼 메시지가 특정적/고정적이다. 문장은 기쁨과 희망과 같은 긍정적인 이미지(이상)를 창출하는데, 맥락에서 벗어난 손의 이미지는 다른 맥락으로 합류해서 수용될 일 없이, 장소와 시간을 불문하고 내걸 수 있는 이미지-의미가 된다.

노한솔_틈 사이로 빛나는 구_장지에 먹, 스프레이_22.7×15.8cm_2022

또 다른 하나는 '버려진 정의들' 시리즈다. 작가가 작품으로 기록한 이미지는 처음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던 이미지가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 경험에 기반한다. 죽은 강아지를 생전에 찍은 사진이 영정사진으로 보인 작가의 경험에 비추어, 시차(時差)를 두고 봤을 때 결과로부터 도출되어 의미가 변한다. 그때가 과거로 향하면서 일어날 수밖에 없는 시차, 그리고 결과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는 시각에 비춰볼 때, 작가가 그린 이미지는 현재가 만든 가소(可塑)적인 과거로 나타난다. 처음 봤을 때와 지금 봤을 때 이미지의 변화 없이, 보는 시각 즉 의미(부여)가 변하는 일은 정의할 수 없는 일이다.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정의할 수 없다기보다 어떻게 정의될지/될지도 모르는 상황에 직면한 상태다. 두 가지 작품은 이미지에 의미가 덧붙여지는 결속의 상태가 불확실한 측면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고정적이고 어떤 경우-시기와 장소를 불문하고 발설(發說)할 수 있는 경우나 결과로(부터 시작해 결과로) 수렴되는 경우-에 특정 역할에만 충실한 측면을 보여준다.

노한솔_치열한 구_장지에 먹, 스프레이_24×24cm_2022
노한솔_시작과 끝_장지에 먹, 스프레이_42×29.5cm_2022

두 가지는 사실 별개의 작업 방식이면서 동시에 '구'의 움직임을 잘 담고 있다. 구는 입체적이면서 동시에 우리 눈에 평면적으로 보인다. 원의 납작함과 달리, 구는 동적이다. 특정 위치를 포획하고 그 내부에 공통적인 규칙이 세워지는 것과 달리, 구는 높낮이, 굴러가는 면들이 일정하지 않고 변할 수 있다. 작가가 '원'이라는 표현 대신 언급하는 '구'는 「틈 사이로 빛나는 구」나 「치열한 구」 같은 작품에서 실제로 그러하듯, 음영이 드리워지고 명암이 구분되는 존재다. 뿐만 아니라 전시장 보일러실에 걸린 작품 제목처럼 '시작과 끝'은 비-결정적인, 다시 말해 시각적 결과에 의미를 시작부터 결정할 수 있고, 시각적 결과의 시작에 의미를 미리 결정할 수 있는 관계를 그린다. 비유는 다방면에 노출되어 있고 다른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표현을 굴려간다. 그런 와중에 의미를 풍성하게 할 수도 있는 한편, 어떤 메시지에 고정되어 구속될 수도 있다. 가만히 있으라고 멈춰 세우라는 말을 움직이는 구에 요구하듯이 말이다.

다행히 우리는 원 대신 구를 눈을 감고서도 만질 수 있다. 그런데 어떤 부분이 위를 향하고 아래를 향하고, 다시 위를 똑같이 향할진 본다고 해서 모를 일이다. 어쩌면 원을 그리듯 둥글게 모여 손에 손 잡고 가만히 있으면 좋겠다고 바랄지도 모른다. 모든 위치가 면이 될 수 있고 언제 어떻게 변할 수 있을지 모르고 구를 들고 있는 것처럼, 노한솔의 작업을 두 눈으로 직접 보면서 동시에 우리는 구의 그러한 불안정한 상황을 이미지와 언어 사이에 감각하게 된다. 전시에서 우리는 맥락이 다시 쓰여지고/씌워지고 의미를 덧붙여주는 일 사이에서 의미와 이미지의 단단한 결속에서 벗어나게 해주면서 동시에 그렇게 읽히는 것으로 이미지가 수용되는 불안정한 상황을 마주한다. 어떻게 굴러갈지 모르는, 면할 수 없이, 모든 경우에 직면할 수밖에 없는 구와 같이, 작가가 그리는/그려나가는 평면은 비록 만질 수는 없지만, 이미지와 의미 사이를 (다시) 감각적으로 다듬는다. ■ 콘노 유키

Vol.20220615a | 노한솔展 / NOHHANSOL / 盧한솔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