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조와 응시:마음으로 관찰한 자연

박찬선展 / PARKCHANSUN / 朴贊善 / painting   2022_0630 ▶ 2022_0710 / 월요일 휴관

박찬선_green garden1_캔버스에 유채_130×130cm_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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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입장마감_05:30pm / 월요일 휴관

금호미술관 KUMHO MUSEUM OF ART 서울 종로구 삼청로 18(사간동 78번지) Tel. +82.(0)2.720.5114 www.kumhomuseum.com

Ⅰ. 거의 좌우 대칭으로 성장한 식물의 곧게 뻗은 잎 사이로 스며드는 투명하면서 찬란한 빛, 전면에 돌출한 이파리 뒤로 켜켜이 쌓인 잎이 만들어내는 공간의 깊이와 그 사이로 스며드는 대기의 부드러운 흐름, 넘쳐나는 녹색의 싱그러움이 전달하는 아름다움을 표현한 박찬선의 작품을 보면서 나는 화면을 가득 채운 이파리들이 아우성치는 생명의 환희를 발견한다. ● 광합성을 통해 흡수한 탄수화물을 빛에너지와 결합하여 싱싱함을 유지하는 식물에게 햇빛과 양분, 수분은 필수적이다. 박찬선의 그림 속에는 이러한 싱싱함의 조건인 밝은 햇살을 받아 건강하게 생육하는 식물의 푸름이 넘쳐난다. 따라서 조밀한 이파리로 화면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으나 촉촉한 대기와 햇살의 축복으로 호흡하면서 바람에 하늘거리는 식물을 통해 생명으로 향한 경의와 예찬을 표상한 것으로 느낄 수 있다. 작가는 이 작품들에서 녹색정원을 걷는 듯한 느낌을 캔버스에 담고자 했다고 한다. 그 속에는 자연의 푸르름을 통해 코로나라는 긴 터널의 고립과 단절을 인내해온 우리에게 위로와 보상, 극복과 용기와 새로운 희망을 제공하고자 한 작가의 따뜻하고 아름다운 마음도 담겨있다.

박찬선_green garden2_캔버스에 유채_130×130cm_2020

작업실에 펼쳐진 작품을 보면서 하나의 줄기로부터 좌우로 뻗어나간 잎들을 보면서 나는 먼저 소철을 떠올렸다. 내가 작업실을 다녀온 후 작가는 이메일을 통해 소철이 아니고 외국 여행에서 보았던 푸르름과 생동감이 두드러진 열대지역의 식물을 소재로 그렸다고 했다. 사실 잎이 하나의 줄기로부터 좌우 대칭으로 뻗어 나온 식물은 많지만, 형태로 볼 때 황금 지팡이 야자, 대나무 야자로도 알려진 아레카 야자(Dypsis lutescens)란 식물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식물을 좋아하고 화분에 제한된 종류의 식물을 키우며 열심히 돌보고 있지만 식물에 대해 거의 문외한인 나로서는 그림 속의 식물이 무엇인지 궁금할 따름이다. 아마 식물학자나 아마추어라 하더라도 식물에 관한 지식과 정보를 가진 원예가라면 그림만 보고 어떤 식물인지 금방 파악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그림 속의 식물이 무엇인가가 아니라 그것을 그린 작가의 마음이 그림 속에 어떻게 투영되었는지 일 것이다. ● 박찬선이 그린 자연은 멀리서 바라본 것이 아니라 가까이 근접하여 관찰한 자연의 일부이다. 작가는 발견된 풍경 전체를 그리지 않고 부분을 확대하여 그리는 이유에 대해 우리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조형적 아름다움과 대상을 확대함으로써 화면에 추상적인 요소를 복합적으로 보여주어 또 다른 감동을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나아가 식물의 파편화된 자연풍경은 작가의 내면 풍경을 드러낸다고 했다.

박찬선_green garden3_캔버스에 유채_155×300cm_2022

문득 이 그림이 풍경일까 아니면 정물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 자연을 포착하였다는 점에서는 풍경이라 할 수 있다. 파리 근교의 지베르니에 작업실을 짓고 일본식 다리가 있는 정원을 꾸민 모네(Claude Monet)가 백내장으로 희미해진 시력으로 그렸던 수련처럼 박찬선의 작품을 가까이서 바라본 풍경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풍경화가 대체로 하늘, 산, 계곡, 강, 숲, 또는 도시와 같은 대상을 넓은 시야로 구성한 그림을 가리킨다고 할 때 특정한 식물을 정밀하게 그린 박찬선의 그림은 정물에 가깝다. 특히 정물은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대상을 사실적으로 그린 것이 아니라 나름의 상징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간단하게나마 그것을 훑어보며 정물화의 역사를 추적할 필요가 있다. 먼저 가장 흔한 정물이 꽃이다. 만발한 아름다운 꽃은 생명, 믿음, 성장, 아름다움을 의미하며, 꽃말은 이러한 상징성을 강화하는 요소이다. 그러나 시든 꽃은 이러한 것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과일이 가득 담긴 바구니는 화가에게 다양한 색상과 질감의 표현에 대한 의욕을 자극하면서 동시에 종교적, 신화적 상징을 제공한다. 예컨대 기독교의 구약성경에서 사과는 에덴동산에서 금단의 열매를 먹은 하와와 관련하여 유혹과 지식을 의미한다면 포도는 로마의 포도주의 신 바쿠스와 연관하여 쾌락과 정욕을 암시한다. 반면에 석류는 그리스신화에서 봄의 여신이자 지하세계의 여왕인 페르세포네와 관련이 있다. 17세기 이탈리아 초기 바로크의 거장 카라바조(Caravaggio)는 극적인 명암대비를 의미하는 '테네브리즘(Tenebrism)'으로 유명하지만 정물화도 그렸다. 카라바조의 정물화에서 바구니에 가득 담긴 과일을 자세히 관찰하면 벌레가 먹고 썩은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탐스런 과일을 싱싱하게 그린 것이 아니라 벌레 먹어 상한 모양으로 그린 것을 통해 당시 이탈리아에서 진행 중이던 프로테스탄트의 종교개혁운동과 이에 대응한 가톨릭교회의 반종교개혁운동 사이에서 작가가 느낀 미묘한 심리적 갈등을 읽을 수 있다. ● 박찬선의 작품을 보며 내가 '생명으로 향한 경의와 예찬을 표상'하며, '생명의 환희'를 발견한다고 말한 이유도 작품 속 식물의 생동하는 색채에 주목하여 의미를 부여했기 때문이다. 이런 해석은 당연히 작가의 의도로부터 출발한다. 또한 그의 작품에서 녹색의 싱싱함 사이로 언뜻 나타나는 잎이 고개를 떨군 채 황색으로 시들어가는 이파리를 통해 인간의 삶을 연상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식물도 생명을 지닌 유기물이므로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하기 마련이다. 뿌리를 통해 영양을 흡수하고 잎으로 광합성을 하며 성장하는 식물은 어쩌면 탄생으로부터 성장을 거쳐 죽음에 이르는 인간의 삶과도 비슷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뿌리로 자손을 번식하여 군락을 이루든 씨를 퍼뜨려 다른 지역에 뿌리를 내리며 그곳에 이미 자라고 있는 식물과 투쟁하며 살아남아야 하는 식물의 운명은 다윈이 진화론에서 말한 자연선택의 지배를 받는다. 따라서 이 작품들은 살아있는 자연의 싱싱함과 생의 마감을 준비하는 시들은 자연을 통해 삶과 죽음의 순환을 동시에 포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박찬선_green garden4_캔버스에 유채_60.6×182cm_2022

Ⅱ. 고대 회화에서 정물은 신화적, 영웅적 주제를 꾸미는 소품쯤으로 취급되었으나 베수비우스 산의 화산폭발로 잿더미에 묻힌 고대 로마의 휴양도시 폼페이 유적의 벽화 속에 나타나는 풍성한 과일은 디오니소스 축제의 향락과 호라티우스(Quintus Horatius)의 유명한 말로 알려진 '현재를 누려라(Carpe Diem)'를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가 지배하던 시대에도 백합이 동정녀 마리아의 순결을 상징하는 등 정물은 종교적 주제를 강조하기 위한 상징물(amblem)이나 지물(attribution)의 역할을 담당했다. 서양미술사에서는 정물이 독립된 장르로 등장한 것을 대체로 17세기로 파악한다. 영어로 정물화를 의미하는 'still life'는 17세기 중엽 플랑드르에서 '움직이지 않는(still)' '자연(leven)'이란 뜻을 지닌 단어인 'stilleven'에서 파생했다. 이 단어는 과일, 꽃, 생선 등을 지칭한 것이었는데 독일에서 'stillleben'이라 불렀고 영국에서는 '고요한 삶 또는 정물'이란 의미에서 'still life'라 번역해 사용했다. ● 정물화는 무역과 상공업이 발달한 북부 독일과 네덜란드를 중심으로, 특히 플랑드르 지방에서 유행했는데 그 배경에는 경제발전으로 등장한 부르주아지와 막대한 부를 축적한 상인들의 수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정물화에 등장한 소재는 부를 과시하기 위한 것이거나 물질로 향한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도 있었으나 삶의 덧없음을 상징하는 것도 나타났다. 삶의 허망함을 드러내는 오브제 중에는 해골이나 동물의 사체처럼 직접적으로 죽음을 지시하는 것도 있었으나 꽃바구니에 담긴 화사하게 핀 꽃, 촛불, 거품처럼 상징적인 것도 있었다. 화사하게 만개한 꽃은 언젠가 시들기 마련이고 양초의 불빛은 진리와 지식을 상징하지만 촛농이 다 녹으면 사라진다. 그래서 정물화 속의 이런 사물들은 인생무상이란 의미에서 '바니타스(vanitas)'라 했는데 곧 '죽음이 옆에 있음을 항상 기억하라(memento-mori)'란 교훈적 경고를 담고 있다. 이런 바니타스 정물화는 비록 물질적으로 성공했을지라도 언젠가 저승사자가 데려갈 것이므로 도덕적이고 근면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교훈적 뜻을 품고 있다. 정물화의 인기가 유럽 전역으로 퍼짐에 따라 북유럽 미술과 남부 유럽 미술 사이에 양식적 차이가 발생했다. 플랑드르와 네덜란드는 극도로 사실적인 스타일로 그림을 그리는 경향이 있었고 남부 예술가들은 카라바조의 부드러운 자연주의를 선호했다.

박찬선_green garden5_캔버스에 유채_194×97cm_2021

독일과 네덜란드에서 정물화가 성행할 때 프랑스에서 정물화는 여전히 '하위 장르(petit genre)'에 불과했다. 프랑스의 왕립 회화·조각 아카데미가 장르의 위계를 정하면서 루이 14세 시대에 공식 궁정 역사가로 활동하며 『예술연대기』을 저술한 펠리비앙(André Félibien)은 1667년에 쓴 「장르의 위계(hiérarchie des genres)」에서 '완벽한 풍경을 그리는 화가는 과일이나 꽃, 조개만 그리는 화가보다 위에 있으며, 살아있는 동물을 그리는 화가는 죽은 것과 움직이지 않는 것만 그리는 화가보다 높게 평가할 만하다'는 취지로 '죽고 움직이지 않는 대상'을 그린 정물화가를 제일 아래 서열에 배치했다. 18세기경 프랑스에서 정물화는 '죽은 자연(nature morte)'이란 뜻을 지닌 용어로 정립되었다. 이탈리아에서도 비슷한 의미의 '나투라 모르타(natura morta)'를 사용했다. ● 그러나 근대 미술비평가 디드로(Denis Diderot)는 1759년의 살롱비평에서 당시 만연하던 로코코의 '우아한 향연(fête galante)' 취향을 추구한 앙투안 와토(Antoine Watteau)나 현실의 권태를 에로틱한 연애로 표현한 부세(François Boucher)와 프라고나르(Jean-Honoré Fragonard) 등의 작품에서 특징적인 우아하고 부드러운 파스텔 색조와 예술을 위한 예술의 극치를 보여주는 화가와는 달리 자연대상을 냉철하게 관찰하여 사실적으로 재현한 샤르댕((Jean Baptiste Simeon Chardin)의 정물을 주목하며 열렬한 찬사를 보냈다. 샤르댕의 성공은 마침내 새로운 용어의 채택을 결정했고, 마침내 1756년에는 '정물(nature morte)'이란 용어로 정착되었던 것이다. 샤르댕의 성취는 훗날 근현대 화가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마네(Édouard Manet), 마티스(Henri Matisse), 세잔(Paul Cézanne), 브라크(Georges Braque), 수틴(Chaïm Soutine), 모란디(Giorgio Morandi)를 비롯하여 루시앙 프로이트(Lucian Freud)에 이르기까지 모두 샤르댕(Chardin)이 이룩한 성과를 독자적으로 발전시킨 화가라 할 수 있다.

박찬선_green garden6_캔버스에 유채_194×97cm_2021

Ⅲ. 정물화가 독자적인 장르로 자리를 잡으면서 정물화는 미술평론가뿐만 아니라 철학자에게도 주목받았다. 그 중에서 내 마음을 움직인 것이 고흐(Vincent van Gogh)의 그림에 대한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의 해석과 세잔의 정물에 대한 메를로 퐁티(Maurice Merleau-Ponty)의 해석이다. 하이데거는 고흐가 그린 「한 켤레의 구두」를 소박한 농부의 아내가 신던 것으로 생각하고 고단하지만 경건한 농촌의 삶을 매우 시적으로 해석했다. 1930년 암스텔담에서 고흐의 작품을 본 하이데거는 그 작품이 자신이 추구하는 존재론을 드러낼 수 있다는 믿음으로 1952년에 출간한『예술작품의 근원(Der Ursprung des Kunstwerks)』에서 "낡은 신발 안쪽으로 드러난 어두운 틈새로 주인의 고생스러운 걸음걸음이 뚜렷하게 보인다. (...) 구두 가죽에는 대지의 습기와 풍요로움이 스며있고, 구두창 아래에는 해가 떨어질 무렵 밭길을 걸어가는 외로움이 펼쳐진다. 이 신발에는 대지의 소리없는 외침이 진동한다"는 문학적 감성이 물씬 풍기는 표현으로 작품의 의미를 천착했다. 이에 대해 미술사학자 샤피로(Meyer Schapiro)가 구두의 주인은 농부의 아내가 아니라 고흐 자신이라고 문제를 제기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하이데거가 강조하고자 했던 것은 고흐의 구두 그림이 사물, 즉 존재자(das Seiende)로서의 구두가 아니라 구두란 존재(das Sein)를 충실한 방식으로 묘사했다는 점이다. ● 세잔의 사과에 대해 상징주의 화가 모리스 드니(Maurice Denis)는 "역사상 유명한 사과가 셋 있는데 첫째가 이브의 사과이고, 둘째가 뉴턴의 사과라면 세 번째는 세잔의 사과이다. 평범한 화가의 사과는 먹고 싶지만 세잔의 사과는 마음에 말을 건넨다"고 했다. 세잔은 여러 개의 소실점이 한 작품 속에 작동하는 방법으로 기하학적 원근법을 파기하고 형태를 왜곡함으로써 르네상스 이후 회화를 지배했던 규범에서 벗어나 현대회화로 진입하는 길을 열었다. 세잔의 혁신은 전통에 익숙한 사람의 눈에는 낯설고 불편한 것이었으나 현상학 철학자 메를로 퐁티는 「세잔의 회의」에서 과학이나 상식으로 이해하는 지각과는 다른 체험된 지각이 무엇인지를 논의하면서 실질적인 지각 체험을 손실 없이 그림으로 표현한 화가로 세잔을 지목했다. 즉 세잔의 작품이 '태동하는 질서에 대한 인상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박찬선_green garden7_캔버스에 유채_130×130cm_2020

박찬선의 「녹색정원(Green Garden)」 연작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식물의 형태 못지않게 맑고 투명하게 빛나는 색채이다. 화면 위로 돌출된 이파리 아래에 겹쳐진 잎으로까지 비추는 빛의 파동도 중요하다. 특히 화면을 예리하게 나누는 사각형의 화면은 빛을 프리즘 등의 도구로 색깔에 따라 분해해서 살펴보는 스펙트럼이거나 작가가 말한 것처럼 '자연의 색채 본질에서 작가 자신의 심상에 맺힌 상상의 색채'일 수 있다. 주조색인 녹색과 보색을 이루는 이 긴 사각형 속의 색채는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색채의 하나일 수도, 화면에 변화를 부여하는 작가만의 개성적인 색채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나아가 이 작품들이 마음으로 관찰한 자연의 일부를 표현한 것이므로 작가의 마음이 머무는 공간이자 영역이라고 볼 수도 있다. ● 고요한 마음으로 사물을 비추어보는 것을 관조(觀照)라고 하는데 불교에서는 영원히 변치 않는 진리를 비추어본다는 의미를 지닌다. 반면에 눈길을 모아 한곳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것을 응시(凝視)라 한다. 박찬선의 정물은 관조한 자연이자 응시를 통해 마음에 맺힌 열린 세계를 포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식물을 차분하게 그렸으나 눈에 비친 자연을 사실적으로 재현한 것이라기보다 지각된 자연을 화면 위에 재구성한 것이므로 작품 전체를 관류하는 분위기(aura)는 정적이다. 이 고요함 속으로 빛이 스며들고 바람이 침투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 작품에서 빛의 미세한 흐름, 바람에 잎이 흔들리며 내는 소리, 식물이 신진대사를 하며 내는 냄새까지 느끼게 된다. 작품에서 외부의 환경에 의해 발생하는 소리뿐만 아니라 식물의 호흡하는 소리까지 지각한다면 과장일까. 이를 하이데거의 논법을 빌어 말하자면 이 작품에는 대지의 소리 없는 외침이 진동하고 있다. 빛과 색채, 질서 속의 미세한 움직임, 고요와 생의 유지를 향한 식물의 강인한 의지가 교차하는 이 작품들은 아름다움으로 향한 작가의 마음이 투영된 풍경이자 세계이다. ■ 최태만

Vol.20220630a | 박찬선展 / PARKCHANSUN / 朴贊善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