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사실은 그러하지만, 그것과는 상관없이

일반인 비평가 프로그램展   2022_0720 ▶ 2022_0808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참여작가 김소형_김수경_김지형_김호이_노한들 서가영_웅섭_전윤승_정지원_최민영

후원 / 울산광역시_울산문화재단 주최,기획 / 아트시그널_문화도모공간 카바레볼테르

문화도모공간 카바레볼테르 Culture space Cabaret Voltaire 울산시 남구 봉월로75번길 27 B1 Tel. +82.(0)10.8776.3692 @space_cabaret_voltaire youtu.be/4rhPFV-w3z0

울산 전시공간 문화도모공간 카바레볼테르는 작가들의 활동 방향성을 위한 전시 및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있으며, 작가들에게 대중과의 소통과 예술성을 고찰해나가는 과정에 도움을 드리는 것을 목적합니다. ● 『일반인 비평가 프로그램』은 미술 이론, 큐레이팅, 평론 등의 기존 미술비평체계를 벗어나 일반 대중의 미술 비평을 통해 작가의 작품에 대한 대중의 관점을 파악하여 향후 활동에 도움 전달을 의도하여 기획한 프로그램입니다. ■ 문화도모공간 카바레볼테르

김소형_채우다 덮다 긁어내다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240×210cm_2020~1
김소형_채우다 덮다 긁어내다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240×210cm_2020~1

김소형 작가의 「채우다, 덮다, 긁어내다」의 제목을 보았을 때 인생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본능만 존재하던 유아기의 시절부터 시작하여 시간이 지나고 경험이 쌓일수록 성격과 관념이 생겨나는 우리의 인생처럼 말이다. 작품은 그러한 단계를 밟아나가 만들어진 것처럼 보인다. 아무것도 없던 흰 캔버스에 검은 물감을 덮고, 긁어내고, 다시 덮는 것을 반복하며 작품이 완성된다. 한 개인이 인생을 살며 채워나가고 그려나가는 일련의 과정 같기도 하다. ● 시간이라는 찰나의 흔적들이 화면에 긁혀지고 채워짐으로서 남겨진 흔적을 통해 작가는 자신의 어떤 경험과 시간을 기록하고자 하는 거였을까? 그리고 이 과정의 완성을 통해 어떠한 편안함에 이르게 되었는지 궁금해졌다. ● 나는 특별한 일상을 기록하는 것을 좋아한다. 특히나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관계를 형성하였을 때, 그 사람과 함께한 시간들을 기록하는 것을 말이다. 단순히 어떤 경험을 했다, 어떤 감정을 느꼈다 정도로 짧게. 이러한 순간들을 쌓아 훗날 꺼내보았을 때 당시의 좋았던 기억들을 떠올리고자 하는 의도에서 하는 작은 행위이다. 그러나 그 기록들을 꺼내봤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게다가 어느새부터 서서히 귀찮아져 관계에 있어 초기의 순간을 제외하고는 기록이 없다. 그때그때 기록하여 언제나 꺼내보고 싶을 정도로 찬란하다고 생각했던 순간들의 반복에서 오는 권태와, 설렘의 망각으로 인한 작용일 것이다. 그러므로 앞서 말한 "기록하는 것을 좋아한다"라는 표현은 적절히 못했다. ● 작가는 채우고 긁는 일련의 과정들을 통해 작품에 담고자 한 기록과 시간들을 훗날 어떤 태도로 대할 것인가 궁금하다. 그리고 오랜 제작기간이 걸렸을 이 작품에 어떤 권태를 느끼진 않았을까? 예술가들이 작품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느끼는 사유는 비예술가인 내가 결코 취할 수 없는 상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김소형

김수경_떠오르는 형태들_도자, 파운드 오브제_가변설치_2022
김수경_떠오르는 형태들_도자, 파운드 오브제_가변설치_2022

작가는 서로 다른 구성의 세 조형물을 통해 어떤 한 가지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걸로 보인다. 그것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모호했다. 인간의 관계라는 게 그렇다. 타인과의 관계가 중요한 세상에서, 그렇다면 어떤 관계가 이상적이고 건강한 관계일까? 모호하다고 하는 의미는 여기에서 나온다. 세 작품의 형태를 통해, 우리는 좋은 관계에 대해 좀 더 광범위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교훈을 얻는다. 어떤 이에게 좋은 형태의 관계는, 또 다른 이에게는 반대로 다가올지도 모를 일이다. ● 구체적으로 분석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케이블타이를 빽빽이 엮어 불판을 지탱하는 모습은 수많은 사람들의 협력으로 어떤 일을 완수하는 것처럼 보인다. '백짓장도 맞들면 낫다'라는 속담이 생각난다. 다수의 사람들이 좋은 관계로 협력하면 어떤 일을 해낼 수 있다. 빽빽이 모여 있는 모습은 그만큼 사람들 간의 더 긴밀한 관계를 강조하는 느낌이다. ● 하지만 거기서 도자와 나무막대로 눈을 돌리면 생각의 변화가 일어난다. 분명히 앞서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좋다는 느낌을 받은 것 같은데, 이것은 가까울수록 관계는 더욱 뒤틀리고, 종점에는 부서질 우려까지 내비친다. 여기서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적당한 거리감을 드러낸다. 너무 멀면 막대를 지탱할 수 없지만, 반대로 너무 가까우면 끊어진다. 어쩌면 너무나 긴밀한 관계도 독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숨기고 싶었던 건 아닐까 한다. 흔히 말하는 밀당이 필요한 셈이다. ● 마지막 조형물은 개인적으로 꽤나 우습게 다가왔다. 그 안에 담긴 의미를 곱씹어 보니, 사람들 사는 게 다 똑같다는 생각에서 나온 조소였다. 사람들 중에는 자신을 포장하려는 성향을 가진 자도 있다. 조금 더 멋들어진 모습으로 자신의 겉면을 구성하면, 그것만으로 나와 관계를 형성하려는 사람들이 생긴다. 우리가 겉이 아닌 알맹이를, 외면이 아닌 내면을 보라고 주구장창 떠들어대는 이유가 이것이다. 꾸미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과연 그렇게 화려하게 꾸민 만큼 내 실질적인 가치가 올라가는지는 재고해볼 법한 일이다. ● 작가의 작품은 모호했다. 그 모호함은 작품 자체의 개성에서 온 것도 있겠지만, 인간의 관계 자체가 모호성이라는 특성을 내포하고 있어서일지도 모른다. ■ 김수경

김지형_시든 꽃의 흔적을 안고서_캔버스에 혼합재료_90×60cm_2020
김지형_시든 꽃의 흔적을 안고서_캔버스에 혼합재료_90×60cm_2020

그려져 있지 않은 그녀의 얼굴이 웃고 있는 것만 같다. 그녀는 시든 꽃을 부여잡고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멈춰 있는 그림, 멈춰진 시간 속 어쩌면 그녀 역시 차마 버릴 수 없는 작품을 감상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 보랏빛 머리카락을 가진 여인의 귀걸이가 유독 눈에 띈다. 마치 조명등 같은 형태가 방안을 밝혀주는 유일한 빛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했다. 가설이 맞아 떨어진다면 이것은 여인이 시든 꽃을 대하는 태도와도 연관 되는 것이리라. 어둔 방안의 한줄기 빛과 같던 꽃이 시들었을 때 그녀가 느꼈을 감정은 무엇이었을까? 화사하고도 어두운 느낌을 주는 이 미묘한 분위기 속에서 작가는 이야기의 운을 뗐다. ● 어떤 이야기를 듣게 될지 잔뜩 기대에 부풀어 다시 제목부터 살펴보았다. 한국에서 한때 유명했던 '시든 꽃에 물을 주듯'이라는 노래가 떠오른다. 그러고 보면 작품은 어쩐지 노래의 뒷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시들어버린 꽃에 열렬히도 물을 주었지만 결국 이미 제 수명을 다한 꽃을 살릴 수 없는 상황에서 그녀가 마지막으로 내린 결론은 그저 부둥켜안는 것이었을지도. ● 시든 꽃에 부었던 사랑이 무엇일지는 모르겠으나 이 연결고리를 이어 나만의 이야기를 이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작품의 시든 꽃이 '사랑했던 것'이라면 그것을 안는 행위는 '미련'이라고 생각된다. 미련, 깨끗이 잊지 못하는 마음이다. 꽃의 의미를 닮은 내 기억들은 간혹 자기 전 이불을 걷어차게 만들기도 하고, 선택에 대해 아쉬워하는 '후회'의 마음을 갖게도 했다. 그러니 내 마음 귀퉁이에 시든 꽃다발이 가득 쌓여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 아쉬워야할 것들이 애착과 추억에 휩싸여 품에 있다면 웃어야할지 울어야할지 답을 내리기 힘들 것 같다. 작가는 그녀의 얼굴을 그리지 않으며 억지로 힘을 주지 않은 솔직한 감정들을 표현해내고 싶다고 했는데 그 판단이 옳았다. 그런데 나는 왜 그녀가 웃고 있으리라 생각한 것일까? 내 마음에 비추었을 때 이것이 아름다운 추억을 기리는 선한 마음일지, 이미 지나간 것에 대한 허망함이 만들어낸 표정일지, 아니면 이제 끝났다는 절망이 만들어낸 광기일지 많은 생각을 스치게 한 작품이었다. ■ 김지형

김호이_똑 똑 똑_실크스크린_42×29.7cm_2022
김호이_똑 똑 똑_실크스크린_42×29.7cm_2022

처음 작품을 보았을 때는 그 색감과 구조의 조화를 보고 잇따라 각각 프레임이 상호 관계의 규칙을 찾아보았다. 일부러 그렇게 했다기보다는 이러한 작품을 마주할 때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는 것 같다. ● 두 개의 이미지 중 하나는 집, 사회, 구성된 것, 인위적인 것, 안위를 위해 조작된 무엇 같은 것으로 느꼈고 다른 하나는 구름과 해, 바다와 달, 바람, 자연적인 것, 원초적인 것, 인간이라는 불완전성 안에서 부정하여도 부정할 수 없이 성질의 근본적인 것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이는 다이아몬드 모양으로 배치되고 인간을 둘러싼 외부적인 것들은 이 다이아몬드를 관통하여, 혹은 긴밀이 관계하여 ×자 모양으로 배치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체적 조망으로 보았을 때 모든 그림이 수평적 흐름을 보여줘서 A-B-A-B-A-B로 끊임없이 순환할 수밖에 없는 생태를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했다. ● 이성과 논리로 세운 집들 사이에서 안정과 만족을 느끼면서도 그 안에서 문명 이전의 본질적 인간 그 자체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인간. 동시에 끊임없이 외부와 내부의 상호 교류를 통해 완전한 하나의 개체로 존재할 수 있는 상호 의존성 등을 생각해 보게 되었다. ● 작품 설명을 읽고 난 후 스스로 느낀 것과 작가의 의도가 너무 달라서 감상이 와해 되는 경우가 있는데, 「똑, 똑, 똑.」의 경우 작가가 이 작품을 만든 현실적 배경이 매우 뚜렷함에도 처음 내가 느낀 이미지나 감상이 그 안에 포함된다는 생각이 들어서 좋았다. 이 말은 작가가 상황의 일면만을 미술적으로 해석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발견한 어떤 가치를 담았다는 말이다. 코로나를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어떤 이가 이 작품을 보아도 내부와 외부의 소통, 내부와 외부가 함께 하나의 자아를 형성한다는 것을 유추해 볼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나는 이러한 작가 가치관이 투영되었을 때만 추상작품이 작품으로써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추상작품을 통해서 아무나 알지 못하는 작가와 나만 아는 내밀한 이야기가 생긴다는 것은 작품 감상자로 하여금 매우 큰 기쁨과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충분히 흥미롭고 유익했다. 마지막으로 작품 설명에서 내가 자연으로 보았던 것이 음파라는 것을 알 수 있었는데 이는 작품을 이해하고 의미를 보강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옆으로 누운 인간의 형상과도 유사하다는 점에 매우 공감한다. 작품 설명에서 무엇보다 좋았던 점은 똑, 똑, 똑. 이 단절음임과 동시에 세계와 연결되고자 하는 시도 그 자체라는 말이었다. 삶과 존재의 의미를 깊게 탐구한 작가의 내면이 자연스레 작품에 투영되었기에 작품을 통해 소통이 가능했던 것이라는 확신을 주었다. 매우 흥미로웠고 자기와 세계에 대한 날카로운 성찰이 느껴지는 좋은 작품이었다고 생각한다. ■ 김호이

노한들_도로노면표시집_3D print filament_가변설치_2022
노한들_도로노면표시집_3D print filament_가변설치_2022

사람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의식주 중 하나를 차지하는 '집'이라는 역할은 개인의 주거공간이자 안식의 장소이다. 도로노면표시를 통해 자기가 살고싶은 집을 표현했다는 노한들 작가의 작품 의도를 보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일반적인 집 정도는 아니더라도 작품의 사이즈를 좀 더 크게 했으면 어땠을까? 라는 아쉬움이었다. 어린아이도 갖고 놀 수 있을만한 장난감 정도의 작품 사이즈가 작가의 의도를 온전히 관객에게 전달하기에는 약간의 부족함이 있지 않았나 싶은 것이 첫 인상이다. ● 그러나 작가의 경험에서 비롯된 작품의 내용은 그 자체로 훌륭하다는 생각을 했다. 시위자의 눈빛을 본 경험에서 기인한 작가가 가진 후유증과 그것을 이겨내려 자신만의 성역을 구축하려, 도로노면표시가 가진 '안전'이라는 의미를 '집'이라는 키워드와 연관지어 의미를 극대화하였다. 이 부분에서 나는 작가의 상상력이 대단하다고 느꼈다. 단언컨대, 어느 누구도 길거리에 존재하는 도로노면표시를 보고 이런 상상을 해보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어떤 의미도 부여해보려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 이런 생각을 통해 예술가의 관점이란 타고나는 것인가? 아니면 학습을 통해 혹은 작품을 만들고자 하는 의지를 통해 항상 일상적인 것을 다른 관점으로 보려고 노력하기에 이런 발상이 나올 수 있는 것인가? 일반인 비평가 프로그램의 9회차 전시인 노한들 작가의 『도로노면표시』는 지금까지의 작가들 중 가장 신박한 관점을 지닌 작품이라고 생각든다. 추가로, 전문에 밝혔듯이 작품의 크기가 좀 더 컸다면 스케일이 주는 또 다른 효과가 생길 것 같고 작품의 의도가 더 명확히 전달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 노한들

서가영_나무 위 호스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17×73cm_2022
서가영_나무 위 호스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17×73cm_2022

자연물과 인공물의 경계를 그리고자 한다는 작가의 말에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누가 보아도 자연물과 인공물은 그 본질, 존재, 외형, 목적 면에서 모두 분명한 경계가 있기 때문에 굳이 그 경계를 그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고민하게 된다. ● 작가는 현실이 꿈같기 흐리멍텅해졌다고 자신에 대해 이야기해준다. 모든 것이 흐릿해지고 뭉개지고 내가 보는 것보다 한뼘 멀리 존재하듯 느껴진다면 어떤 기분일까. 오래 곰곰히 생각해 보아야했다. (생각보다는 상상에 가까웠지만) ● 작가가 보는 세상, 자연물인 줄 알았는데 인공물이었고 인공물인 줄 알았는데 자연물이었던 경험은 나 또한 숱하게 있었다. 그렇다면 사실은 나도 세상을 희미하게 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스스로에게 의구심을 던지게 된다. 그러한 것들의 경계. 내가 예측한 자연물이 인공물이었음을 깨닫는 데에 걸리는 어떤 감각적 변화와 인지의 과정 자체가 자연물과 인공물의 경계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어렴풋이 들었다. ● 작품을 먼저 보고 작가의 작품설명 글을 읽었다. 작품 설명을 읽으며 내가 느낀 것이 이것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작품 설명을 통해 내가 본 것을 끼워 맞추거나 이해하려고 할 필요 없이 바로 그것이 무엇인지 느낄 수 있었다. 처음 작품을 보고 나무와 알 수 없는 무언가라고 생각했고 그 얽힘과 뒤틀림에서 아주 기이하고 또 일면 익숙한 것들을 보았다. 이것은 우리가 세상에 처음와서 어떤 말도 배우기 전에, 어떤 정의도 내리기 전의 세상 같다고 생각했다. 존재 그 자체로 보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보는 것에 대한 정의는 각각 개인의 것일 뿐이고 객관적 사실은 그렇게 존재하고 있다는 것 뿐이다. 대상의 진정을 알기 위해서는 정의하기는 내려놓고 이름 붙이기는 포기하고 그 존재 자체를 바라보는 그 순간만이 진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무 위 호스는 바로 그 순간을 직면하여 보여주고 있다. 작가와 대상물의 시선이 교차되는 완전한 순간. 나는 그것을 훔쳐보고 온 것이다. ● 그 얽혀듦과 통찰과 생경함 속에서 작가는 무엇을 생각했을까. 작가가 자기 자신을 멀리서 본다면 어떻게 보고 어떤 순간을 포착하여 어떻게 그려낼지 매우 궁금해졌다. ■ 서가영

웅섭_화살을 맞은 얼굴을 보여줘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24×151cm_2022
웅섭_화살을 맞은 얼굴을 보여줘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24×151cm_2022

이 작품과 첫 대면은 조금 당혹스러웠다. 강렬한 색채와 비정형화된 선들 사이의 전형적인 두 눈을 마주했을 때 나는 여기서 무엇을 느껴야 하는가 두려움 마음 마저 들었다. 그림을 오래 보고 부분적으로 자세히 보아 어디선가 단서를 얻기 위해 노력할수록 작품을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해석하려고 하는 스스로의 한계를 느꼈다. 작가 노트를 읽고 작가의 생각에 깊이 동감하였고 그러한 작가가 어떤 심상으로 이 그림을 그렸을지 생각하기 위해 노력했다. 화살이 나타내는 것은 무엇일지 고민하고 의미 없는 선과 색은 없다는 작가의 말처럼 이 선과 색들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고민했다. 그렇게 하루 이틀을 보내고 결국 우선 덮어 두기로 했다. 며칠 시간이 지나고 그림이 불현듯 다시 떠올랐을 때 나는 어떤 감각이 느껴지는 것을 알아차렸다. ● 나는 『화살을 맞은 얼굴을 보여줘』에서 어떤 종류의 불쾌감을 느꼈다. 아주 푹신한 소파에서 호스트의 친절한 호의를 받으며 바른 자세로 꼿꼿이 앉아있어야 하는 느낌이 들었다. 여러 다른 추상작품에 비하면 화살 맞은 얼굴을 보여줘 작품은 많은 힌트를 던져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분명한 선들과 뚜렷한 대상. 그리고 제목을 통하여 유추할만한 가능성들이 있다. 그래서 오히려 틀린 답이 나올까 두려웠을지도 모르겠다. ● 그러한 두려움을 애써 외면하며 내가 느낀 불쾌감에 대하여 조금 더 이야기하고 싶다. 아주 선명한 색채들 속의 익살스러운 눈동자, 방향이 틀어진 두꺼운 붉은 입술과 혀. 얼굴은 어딘가를 향하고 있다. 그 방향은 종이 비행기의 방향과 같다. 그의 손에는 무언가가 들려 있다. 그는 지금 화살을 맞은 얼굴을 보여주고 있는 걸까 보여달라고 요구하고 있는 걸까. 어쩌면 그 둘 다인가. 나는 작품 속의 인물이 나와 닮은 구석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자만처럼 느껴지지 않기를 바란다. 혹은 너무 사소하거나 가벼운 감상으로 그려지지 않기를) 순수와 낙천의 얼굴을 하고 내면의 불안과 비도덕성과 부적합성을 숨기는 스스로. 나의 친절은 어떤 이기심에 기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정말 그러한지 아닌지 나 자신도 잘 모른다. 무의식 깊은 곳 어딘가에 있어서 잘 숨어 있다가 이렇게 불현듯 날 것이 드러날 때가 있다. 이 작품은 그 날것과 많이 닮아 있었다. 그래서 나는 불쾌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도촬 된 사진 속 형편 없는 얼굴을 직면한 기분이 들었다. ● 예술과 미술이 해내야 할 작업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한다. 즐거움과 기쁨과 호기심을 주는 작품도 그대로 의미가 있지만, 이 작품처럼 내 안의 무엇을 두들기는 작품은 어떤 감정을 주고(그것이 불쾌함일지라도) 그 후에는 작품을 감상하는 충분한 즐거움을 준다. ■ 웅섭

전윤승_관망자_에폭시 레진, 지점토_130×50×50cm_2022
전윤승_관망자_에폭시 레진, 지점토_130×50×50cm_2022

전윤승 작가의 작품은 음울한 느낌이 든다. 작품 그 자체가 지닌 색과 형태 또한 그렇고, 그것이 어둡고 습한 지하와 결합되어 더 증폭되어 다가왔다. '음울하다'라는 감정. 미디어를 통해 비춰지는 세상의 이면은 대부분이 그러한 느낌이지 않을까. 작품의 화자가 바라보고 있는 휴대폰 속 화면은 지상의 밝은 면을 표출해내고 있지만, 화자는 잿빛으로 가득한 지하에 앉아 있는 것처럼 말이다. 스마트폰이 상용화되고 대중들을 위한 각종 SNS가 발달되면서 휴대폰 화면 속 내 모습은 언제나 밝고 명량하고 즐겁게 보여져야 한다는 강박을 가지게 되었다. 그 이면 속 지하에 자리잡은 내 모습은 그렇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행복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평생을 착각하며. 전윤승 작가의 작품을 통해 이러한 괴리를 전달받게 되었다. ● 작가는 작가노트를 통해 '우리 사회의 안타까운 면'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본인이 위 문장에 표현한 내용들이 '우리 사회의 안타까운 면'일지도 모른다. 물론 다소 극단적인 표현으로 생각을 담아보았기에 '안타깝다'라고 표현될 수 있지만, 반대로 생각해보아 그것이 스마트폰과 SNS의 발달로 인해 자연스럽게 변화된 일상의 모습이라면 굳이 '안타깝다'라는 표현을 하지 않고 무수히 많은 삶의 서사 중 하나로 가볍게 치부하면 어떨까 생각도 든다. 이러한 생각의 전환을 통해 본인의 가진 이야기를 좀 더 솔직하고 담백하게, 굳이 행복하게 보여지고자 자신을 치장하지 않을 수 있다면 말이다. ● 나는 이 작품을 통해 내가 취하고자 하는 삶의 형태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고, 스스로에 대해 무책임하게 관망하지 않아야겠다는 태도를 가지자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 ■ 전윤승

정지원_Dear. XFRIEND 친애하는 옛친구에게_단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_00:01:51_2020
정지원_Eyes wide shut 흐린 눈_단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_00:01:02_2022

나는 해석의 여지가 있는 작품을 좋아한다. 책이던, 영화던, 예술 작품이던 그것이 하나의 결론으로 귀결되는 것보다 나의 경험과 사유에 입각하여 다른 형태의 결론을 자아낼 수 있는 여지가 있는 것이 좋다. 정지원 작가의 영상 속 이미지와 자막은 또 다른 해석의 여지를 주지 않아서 약간의 아쉬움이 들었다. 작가노트를 전달받기 전, 작품만을 보고 작가의 생각을 유추해내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고, 아니나 다를까 작가노트를 읽고 난 후에는 작품이 지나치게 친절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 그러나, 작가가 전달하려는 의도의 명확성을 더 증진시키고자 이런 방식을 취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일례로 법의 제정에 있어 전문용어 또는 일상생활에서 사용하지 않은 낯선 용어가 많은 이유는 해석 여부에 다양성을 피해 국민에게 피해를 입힐 가능성을 방지하려는 이유에서이기 때문이다. 목적만을 위해 하나의 결론을 도출해야 하는 법령처럼, 정지원 작가의 작품 또한 본인이 관객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좀 더 명확히 하고자 이런 방식을 택하지 않았나 싶다. 너무 익숙해져 망각하고 있던 환경이라는 가치는 너무나도 소중하기 때문에 말이다. ● 이러한 관점을 통해 정지원 작가는 굉장히 순수한 사람일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무형이던, 유형이던 어떤 것을 생산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돈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이다. 예술가 또한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작품을 팔아서 생계를 꾸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지원 작가는 팔기가 애매한 영상 작품을 생산한다. 그것도 많은 시간을 들여서까지 말이다. 『흐린 눈』 영상의 시퀀스를 구성하는 적어도 백 장 이상으로 짐작되는 회화작업을 통해 판매 가치가 애매한 하나의 영상을 만든 것이다. ● 이 점이 작가노트에 담긴 내용과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더 큰 힘을 실어주었고, 친절함의 이유와 그 목적성을 더 명확히 해주었다고 생각한다. 관객으로 하여금 작가가 생각하는 메시지를 전달받을 수 있도록 자기 희생의 시간을 들여서 만든 결과물인 것이다. ■ 정지원

최민영_Paradox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80×150cm_2021
최민영_Paradox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80×150cm_2021

Paradox. 역설을 뜻한다. 병치된 개념이 논리적으로 대립하는 '가치의 충돌'. 과거와 현재, 미래가 동일선상에 놓이는 것 또한 어쩌면 역설이라는 개념에 부합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1초에 1초씩 미래를 향해 가고 있고, 우리가 부르는 현재라는 것은 눈 깜빡이는 것보다도 더 찰나의 순간이다. 현재는 봇물 터지듯 무수히 빠른 속도로 과거라는 개념으로 회귀한다. 미래는 우리가 곧 맞닥뜨릴 근미래, 아직 까마득하다고 느껴지는 먼 미래가 있다. ● 작가가 과거, 현재, 미래를 직접적으로 나타낼 수 있는 이미지를 사용하지 않고 작품을 작업하려는 의도가 있었다면, 나름 성공적인 구상이라고 생각한다. 작품을 보고 한 단어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주마등'. ● 작품에서 인상적으로 다가오는 부분은 빗발치는 총알과 토끼를 물어뜯는 검은 짐승, 소년인지 소녀인지 모를 자의 눈물이다. 아직 겪어보지 않았지만, 인간은 죽음의 순간에 닥치면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들이 필름의 형태로 눈앞을 스쳐 지나간다고 한다. 나름대로 해석을 하자면, 소녀인지 소년인지 모를 누군가가 총알에 몸이 꿰뚫림에 임박한 찰나를 그려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주변의 사각형 안에 각각 표현된 것들은 과거나 미래를 나타낸 것이지 않나 생각해 봤다. ● 주인공이 주마등의 순간에 떠올린 찰나의 이미지들은 여러 가지가 있다. 우주의 시작이라고 알려진 대폭발, 빅뱅으로 보이는 이미지도 있으며, 주인공이 주먹 깨나 썼던 소식적을 나타내는 이미지도 보인다. 토끼를 물어죽인 검은 짐승의 이미지나 다른 이미지들은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을까. 아마 이중에는 미래를 나타내는 것도 있지 않을까 한다. ● 과거를 돌아보는 것만큼 나를 성숙하게 만드는 행위도 더없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이 있듯이, 과거의 과오들은 현재와 미래에서 같은 상황에 처했을 때 어떤 언행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정답을 제시해 준다. ● 주마등이라는 게 스쳐지나가는 것 또한, 갑자기 닥쳐온 죽음의 순간에 과거를 후회해 보고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반성의 계기를 마련하는 것이 아닐까. 사람은 앞만 보고 살아갈 수는 있지만, 그렇게 살아갈 수 없다. 이 또한 Paradox. 인간에게 필요한 건 다양한 관점을 가지는 것. 그게 곧 성장이고 성숙이지 않겠는가. ■ 최민영

Vol.20220718c | 비록 사실은 그러하지만, 그것과는 상관없이-일반인 비평가 프로그램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