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arest Yoricke 친애하는 요릭에게

한선주展 / HANSUNJOO / 韓善朱 / painting   2022_0720 ▶ 2022_0731

한선주_밝은 밤_한지에 채색, 방해말_130×194cm_2021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211222d | 한선주展으로 갑니다.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이 전시는 강원도, 강원문화재단의 기금과 KT&G 상상마당 춘천의 협력지원을 받아 제작되었습니다.

후원,협력 / 강원도_강원문화재단_KT&G 상상마당 춘천

관람시간 / 11:00am~06:00pm

KT&G 상상마당 춘천 아트갤러리 KT&G Sangsangmadang Chuncheon Art Gallery 강원도 춘천시 스포츠타운길399번길 25(삼천동 223-2번지) Tel. 070.7586.0550 www.sangsangmadang.com

죽음에 대한 사색은 삶에 대한 시각과 태도로 귀결되므로 결국 죽음_유한성에 관한 이야기는 삶_영원성에 관한 이야기가 된다. 이러한 바탕에서 벌어지는 내면의 시간과 판타지의 세계를 문학적 장치와 회화작업으로 연출하고자 했다. 그럼으로써 우리 스스로 현실의 조건으로 인한 허무와 무력함을 극복할 수 있는 구원의 가능성을 제시하고자 한 것이다...이것은 죽음(요릭)과의 서신을 통해 밝혀지는 현실 속의 구원에 관한 이야기다. ■ 한선주

한선주_오필리어의 죽음_한지에 아크릴채색_130×194cm_2022

요릭과 오필리어, 삶을 정화하는 죽음 ● 미슈테카의 노래. 고도를 기다리며. 친애하는 요릭에게. 먼지로 쓴 시. 작가가 제안하는 이야기 4부작이다. 죽음에 대한 알레고리다. 삶에 대한 알레고리라고 해도 좋다. 삶과 죽음의 관계에 대한 알레고리라고 해도 좋다. 죽음이 열어 놓은 삶, 그러므로 죽음으로 거듭난 삶의 알레고리라고 해도 좋다. 삶이 죽음이고 죽음이 삶일 것이므로. 삶 속에 죽음이 있고 죽음 속에 삶이 있을 것이므로. 매 순간 삶을 살면서 죽음을 생각하는, 시시각각 삶 속에 죽음을 맞아들이는, 그렇게 삶과 죽음이 하나로 직조된 것이 삶일 것이므로. ● 삶을 정화하는 죽음에 대해서는 프로이트 이전에 낭만주의가 먼저다. 특히 밤을 찬미하고 죽음을 예찬한 노발리스가 원천이다. 처음으로 여성 저승사자가 등장하는, 죽음이 저토록 감미롭다면 기꺼이 죽을 수도 있겠다 싶은, 지상에서 이루지 못한 사랑을 내세에 기약하는, 묘지와 폐허에 매료된, 유한에서 무한을 본 낭만주의에서 삶은 다만 죽음과 죽음 이후에 대한 상징으로서만 의미가 있었다. 그리고 낭만주의의 누이인 상징주의와 라파엘전파(존 에버렛 밀레이의 오필리어의 죽음)에서 죽음을 향한 낭만주의의 연모가 그 진정한 실현을 얻는다. 하나같이 문학적인, 문학적인 서사가 강한, 문학과 미술이 자매라고 해도 좋을 시기며 형식들이다. 그리고 여기에 삶보다 예술이 먼저인, 예술이 삶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삶이 예술을 모방하는 예술지상주의와 그 추종자인 댄디즘(오스카 와일드와 보들레르)이 가세하면서 죽음이 그 미학적 의미를 덧입는다.

한선주_우리들의 천국_한지에 아크릴채색_91×117cm_2020

그렇다면 여기서 다시, 최초 작가가 제안한 주제로 돌아가 보자. 작가는 상실을 슬퍼한다(미슈테카의 노래). 그리고 누군가가 상실에 빠진 자기를 건져주기를, 혹은 상실이 가만히 떠나가 주기를 기다리지만, 상실은 그대로 있다(고도를 기다리며). 그리고 마침내 상실과 화해하고, 상실을 자신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인다(친애하는 요릭에게). 그리고 종래에는 주검의 재를 바람에 실려 보내듯 상실을 시로 승화시켜 떠나보낸다(먼지로 쓴 시). 어느 날 상실이 자기를 찾아왔고, 머물다가, 가버린 이야기, 그러므로 상실의 연대긴가. 상실을 아파하고, 상실과 친해지고, 마침내 상실을 떠나보낸 이야기, 그러므로 통과의례 혹은 성장 서사(모든 이야기가 유래한 이야기, 이야기들의 이야기, 그러므로 원형적 이야기)인가. 옴니버스, 그러므로 상실을 주제로 한, 서로 별개이면서 하나로 연결된 4개의 단편인가. 여기서 상실은 무슨 의미인가. 작가는 무엇을 상실했고, 왜 슬퍼하는가.

한선주_Salut_한지에 채색_162×390cm_2020

작가는 극 중 햄릿처럼 요릭, 그러므로 죽음이 가져다준 상실을 슬퍼한다. 상실을 슬퍼하는 것도 같고, 외관상 보기에 상실에서 빠져나온 연후에도 슬픔이 여전한 것도 같다. 상실로 우울해하는 것도 같고, 상실을 시로 승화시킨(그러므로 떠나보낸) 연후에도 여전히 상실을 애도하는 것도 같다. 우울도 슬픔이고, 애도도 슬픔이다. 슬픔도 슬픔이고, 시로 승화된 슬픔, 그러므로 떠나보낸 슬픔도 슬픔이다. 아마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카타르시스(슬픔이 주는 정화, 비극을 통한 정화)와도, 그리고 밀란 쿤데라의 비극(현대인의 삶이 비극적인 것은 현대인이 비극을 상실했다는 것에 있다)과도 무관하지 않은 지경이고 감정일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슬픔에서 빠져나온 연후에도 여전히 슬픔(작가의 표현대로라면 맑은 슬픔) 속에 있었다.

한선주_The way life goes_한지에 과슈, 아크릴채색_130×1050cm_2022_부분

문학적인 서사가 강한 작업인 만큼 작가의 그림에는 이런저런 상징들이 등장한다. 그중 전형적인 그리고 결정적인 경우로 치자면 종이로 만든 집(먼지로 쓴 시), 그리고 해골과 욕조(친애하는 요릭에게)가 주목된다. ● 그렇게 작가는 죽음을 호출하는데, 요릭을 호출하고 오필리어를 호출한다. 두 죽음의 상징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인데, 실제 그림에서 요릭은 해골로, 그리고 오필리어는 욕조로 대체된다. 여기서 욕조는 종이집처럼 또 다른 자기를 상징한다. 그러므로 죽은 자기? 죽음을 쳐다보는 자기? 그런데, 왜 욕조인가. 주지하다시피 욕조는 가장 사적인 공간이며 장소고 사물이다. 그리고 욕조는, 더욱이 작가의 그림에서처럼 물 위에 떠가는 욕조는 마치 요람을 흔드는 바람처럼 유년의 추억을 떠올리게 했을 것이다. 그렇게 또 다른 사물주어 혹은 사물 인격체로 나타난 욕조, 그러므로 자기 분신이 강을 건너는 일련의 풍경화를 그려놓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삶이라는 강일 것이다. 그리고 건너편에 또 다른 삶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를, 죽음이라는 강일 것이다. 그렇게 나룻배와 함께 이미 강물에 몸을 실은 한 사람이 뭍에 서 있는 다른 한 사람에게 안녕 인사를 고한다. 내가 나에게 인사를 고한다. 삶이 죽음에게, 죽음이 삶에게 인사를 건넨다.

한선주_The way life goes_한지에 과슈, 아크릴채색_130×1050cm_2022

예술에 대한 정의가 분분하지만, 그중 결정적인 경우로 치자면 예술은 이야기의 기술일 수 있다. 삶을 이야기하고, 죽음을 이야기하고, 재생을 이야기하고, 환생을 이야기하는 기술이다. 그 이야기들의 와중에서 통과의례가 나오고, 정화의식이 유래하며, 거듭나기가 파생된다. 그 경우와 세목은 다 다르지만, 결국 존재에 대한 이야기, 그러므로 존재론적 서사라는 원천으로 모인다. 존재론적 서사? 이데올로기와 함께 전형적인 거대 담론이다. ● 혹자는 거대 담론의 시대는 갔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시대착오적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삶을 이야기하지 않는 삶이, 죽음을 사유하지 않는 삶이, 재생과 환생이 없는 삶이, 원형과 자기를 모르는 삶이 가능한가. 최소한 유의미한가. 그런 것 없이도 가능하고 유의미한 삶도 있겠지만, 그런 것으로 인해 삶은 비로소 가능하고 유의미해진다는 점도 거부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렇게 상실과 죽음, 그리고 자기 구원을 주제로 한 작가의 그림은, 그러므로 기획은 사사로운, 너무나 사사로운 미시 서사의 시대에 오히려 그 울림이 더 크게 다가온다. ■ 고충환

Vol.20220720a | 한선주展 / HANSUNJOO / 韓善朱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