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인팅-시간, 정념 Prainting-time, pathos

권순왕展 / QWONSUNWANG / 權純旺 / painting   2022_0901 ▶ 2022_0930 / 일,월요일 휴관

권순왕_이륙의 시간 Time to take off_ 캔버스에 유채, 아크릴채색_163×132cm_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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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22_0903_토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일,월요일 휴관

갤러리 초이 GALLERY CHOI 서울 마포구 토정로 17-7 Tel. +82.(0)2.323.4900 www.gallerychoi.com

고인 시간과 흘러가는 시간 ● 이번에 갤러리초이에서 열리는 권순왕의 전시 제목은 프레인팅-시간, 정념이다. 프레인팅이 주제(主題)고 시간과 정념은 부제(副題)다. 과거의 전시에 역사, 시간, 생명이 부제로 등장하기도 했다. 작가가 '시간'에 대해 끊임없는 사유를 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 프레인팅(Praintng)이란 용어는 사전에 없다. 권순왕이 창안한 용어다. 이제까지 판화라고 불리던 것을, 이제까지 회화라고 불리던 것을 그는 프레인팅이라고 명명했다. 그는 왜 굳이 프레인팅이란 용어를 창안했을까. 그리고 이를 공표했을까. 뭔가 절실함이 그에게 있음을 짐작할 수가 있다.

권순왕_거울에 비친 실뭉치들 Ball of thread reflected in the mirror_캔버스에 유채, 아크릴채색_163×132cm_2022

프레인팅은 판화와 회화를 분리해서 어느 한쪽을 지칭하는 말은 아니다. 판화와 회화의 경계를 발견하고 이를 무너뜨린 다음, 판화와 회화에 공통되는 어느 지점, 혹은 판화와 회화의 접면을 발견했을 때 비로소 드러나는 새로운 경지를 권순왕은 프레인팅이라고 지칭하지 않았을까. ● A와 B, 둘로 나누어져 있는 기존의 영역을 하나의 새로운 영역으로 묶을 때는 두 가지 방법론이 있다. 하나는 복합이고 또 다른 하나는 융합이다. 복합은 상이한 둘을 있는 그 상태로 더하기 한 것이다. A+B=AB가 된다. 융합은 상이한 둘을 각각 기본적인 요소로 환원한 다음, 이들을 새로운 구조로 결합한 것이다. A+B=C가 된다. 작품으로서의 프레인팅은 판화와 회화의 복합으로 보일 때도 융합으로 보일 때도 있다. 그러나 작가의 정신과 사유가 지향하는 지점은 궁극적으로 판화와 회화의 융합에 있음을 알 수가 있다.

권순왕_르네불루의 밤바다 Rene Blue's Night Sea_ 캔버스에 유채, 아크릴채색, 목판화 콜라주_91×72.2cm_2022

융합에 필수적인 것은 환원이다. 물을 환원하면 산소와 수소가 된다. 물에서 환원된 산소와 수소가 탄소와 결합하면 웬만한 고분자 화합물의 기초는 이루어진 셈이다. 이들의 결합방식에 따라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수많은 유기화학 제품의 재료들이 만들어진다. 즉 환원을 통해 확산이 이루어지는 셈이다. ● 회화를 환원하고 판화를 환원하면 어떤 기본적인 요소들이 남을까. 회화에 비해서 판화의 환원 과정은 상대적으로 명확해 보인다. 그건 판화가 이미지의 제작, 판의 제작, 프린팅 등 각 과정이 엄격하게 분리된 프로세스의 미술이기 때문이다. 우선 판화가 '판(版)'과 '화(畵)'로 분리되어 있다는 점이 환원 과정에 대한 인식의 접근을 용이하게 한다. 환원은 하나로 뭉뚱그려진 통합적인 상태를 몇 개의 기본적인 요소들로 분리시키는 작업이 아니던가.

권순왕_무대 위의 빨간바나나 Red Banana on the Stage_ 캔버스에 유채, 아크릴채색_53×65cm_2022

판화의 '판'을 기존의 판화적인 영역으로, 판화의 '화'를 회화의 영역으로 분리해낼 수 있다면, 프린트(Print)와 페인팅(Painting)의 합성어인 '프레인팅(Prainting)'의 출현도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인다. 판화가 프로세스의 미술이라고 했을 때, 가시적인 이미지의 제작과정은 이 프로세스 상의 두 지점에서 형성된다. 하나는 판의 제작과정에서 또 하나는 잉크를 묻힌 판을 종이 위에 전사하는 과정에서다. 전자의 이미지와 후자의 이미지는 그 지위와 성격이 다르다. 후자의 이미지가 항상 현상적인 상태로 드러나 있는 데에 비해, 전자의 이미지 즉 판에 새겨진 이미지는 판화작업의 중간 과정에서, 혹은 판화작업의 모든 프로세스가 끝난 후에 잠복될 수 있는 이미지다. 잠복된 이미지는 현상적인 이미지에 선행한다. 그런데 잠복된 이미지를 선행하는 또 다른 실체가 있다. 그 실체는 플라톤이 말한 선험적인 이데아라고 말할 수가 있다. '판'의 세계는 이데아의 재현(판의 이미지)과 그 재현의 재현(종이 위의 이미지)이라는 세계라는 제법 복잡한 프로세스를 갖는다.

권순왕_빛나는 길_아르쉬지에 아크릴채색, 목판화_75×52.5cm_2022

이데아의 재현이라는 점에 있어서 '화'의 세계도 예외가 아니다. 세상의 사물들의 본래의 모습은 초월적이며 완전한 원형(原形, archetypes)이며 이 원형의 재현인 사물, 또 그 사물의 재현이자 묘사인 '화'의 세계라는 프로세스도 판화와 그것과 별로 달라 보이지 않는다. 니엘 또로니(Niele Toroni)처럼 반복적인 붓질의 점들의 드로잉을 아예 판화로 인정해버리는 작가도 있다. 무형의 '판'이 머리 속에 이미 있다고 간주하기에 20장 정도의 에디션은 유형의 판을 만들지 않고 20장의 종이 위에 똑같은 붓질의 드로잉으로 대체한 다음 넘버링을 한다. 판과 화, 판화와 회화가 만나는 이 지점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그 인식의 미학적 좌표를 개념화하는 데서 프레인팅이라는 새로운 세계가 솟아오른다.

권순왕_사이프러스와 파비뇽의 노란 튜울립 Cyprus and Favignon's Yellow Tulip_ 캔버스에 유채, 아크릴채색, 목판화 콜라주_163×132cm_2022

권순왕은 그동안 프레인팅, 판이즘, 개념판화 등을 주창했다. 이 주창을 지지하는 사유의 기저에는 원형을 적극적으로 인정하는 서양 형이상학의 실체주의가 있다. 원형이라는 실체가 있고 그 실체의 반영이 생산이라는 인식은 근대주의를 이끌어왔다. 그 원형을 권순왕은 판이라고 부른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근대주의 이후의 세상에서 영위되는 사물과 장치, 제품들은 이러한 원형과 판의 인식과 응용에 기반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 건축의 설계도면, 사진의 필름, 공학적 제품의 캐스팅 틀, 3D 프린터의 파일, 디지털 사진과 영상의 파일 등이 모두 유형, 무형의 '판'에 해당한다. 더 나아가 생명체의 복제와 자기증식을 가능케 하는 DNA 역시 '판'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이 세상은 모두 판으로 이루어진 세상이라고 상정해봄직도 하다. 전통적인 판화에서는 이들 유형, 무형의 다양한 '판'을 인정하지 않는다. '판'에서 '이미지'가 사진필름의 밀착인화처럼 원치수(原寸)로 전사되는 동판, 석판, 실크스크린 등 제한된 일부의 판만 판화의 구성요소로 인정하고 있다.

권순왕_선택의 순간 Moment of choice_ 캔버스에 유채, 아크릴채색, 목판화 콜라주_91×72.2cm_2022

권순왕의 굳이 프레인팅이라는 새로운 용어를 창안해야만 했던 절실함은 일부분으로 제한된 '판'의 세계를 무한대로 확장시키고 싶은 욕망과 이를 제지하려는 현실의 충돌에서 비롯된 듯 보인다. 프레인팅이란 용어의 창안에까지 이르는 과정을 보면 권순왕의 사유체계는 매우 구조적으로 보인다. 프로세스란 기본적으로 시간의 계열이다. 그 시간의 계열을 공간의 계열로 재배치했을 때 비로소 구조적인 형태의 환원의 작업은 가능해진다. 그리고 그는 환원된 기본적인 요소들을 축출하여 '판'과 '화'의 결합물인 프레인팅이란 용어를 창발했다.

권순왕_소낙비를 맞다 Caught in a rainstorm_ 아르쉬지에 아크릴채색, 목판화_75×52.5cm_2022

그런데 이번 전시의 부제로 붙은 것은 '시간-정념'이다. 시간과 정념은 프레인팅을 가능케 했던 구조적인 사유와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사이프러스와 파비뇽의 노란 튜울립', '거울에 비친 실뭉치들', '르네 블루의 밤바다', '눈물 너머의 풍경', '요람에서 미끄러지는 꽃잎' 등 제목들부터 매우 정념적이다. 정념은 휘발성이 강하다. 공간적인 질서에 배치하기에는 너무나 유동적이고 불안정하다. 정념적이라는 건 그만큼 구조적인 질서와 먼 세계이다. 시간이란 것도 불안정하기는 마찬가지다. 시간의 축을 공간의 축에 배치했을 때 비로소 안정된 시간의 균질성이 어느 정도 확보가 된다.

권순왕_자코메티와의 대화 Talk with Giacometti_ 아르쉬지에 아크릴채색_75×52.5cm_2022

이번 전시에 출품된 작품들의 면면들을 보면 회화와 판화가 혼재된 작품들이 몇 보인다. 이른바 중첩기법의 작품들이다. 중첩기법은 앤디 워홀, 크리스토, 백남준, 바스키아 등 여러 작가들에게서 발견되는 조형적 기법이다. 크리스토는 행위, 행위의 촬영과 사진(판화), 사진 위에 드로잉이라는 프로세스를 반복했다. 백남준은 무한 에디션을 목표로 한 위성중계 공연예술을 했는데, 그 일부의 이미지를 유한 에디션의 판화로 찍은 다음 그 위에 드로잉을 하기도 했다. 컴퓨터에서 출력된 손바닥만한 프린트 위에 최소한의 드로잉으로 덧칠을 한 걸 작품으로 우겨 맨해튼의 카페를 전전하며 팔아가며 작가생활을 시작했던 바스키아는 결국 카페에서 그 작품을 사 준 앤디 워홀과의 만남을 통해 인생의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그의 후기 작업인 대형 회화 속에는 부분적으로 판화를 배치했다. ● 판화로 페인팅 작업을 한 이우환도 있었다. 그의 초기작업 '점으로부터'의 점은 붓질이 아니라 점 크기만한 인판(印板)을 연속적으로 찍은 것이다. 판에 한 번 묻은 물감이 찍기를 거듭하면서 점점 흐려간다. 물감이 완전히 사라졌을 때, 새로 물감을 묻힌다. 그리고 또 찍는다. 짙음에서 흐림으로 옮겨가는 울림의 프로세스에서 순차적인 시간의 매듭이 돋아난다.

권순왕_정념의 시간 Passionate time_ 캔버스에 유채, 아크릴채색, 시멘트_33.4×53cm_2022

권순왕의 이번 전시의 출품작 중에는 바스키아가 했던 것처럼 '회화 속에 판화', 혹은 '판화 주변에 회화'라는 방식의 몇몇 작품들이 있다. 작품 속의 판화와 회화는 서로 충돌, 대립하는 것 같기도 하고 또 서로 융화하기도 한다. 판화로 재현된 이미지는 회화 속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예컨대, '사이프러스와 파비뇽의 노란 튜울립'에 등장하는 수성 목판화의 튜울립 이미지는 '해안가에서 다시 만나다'에서 다시 등장한다. '길가에 서다'에 등장한 수성 목판화의 제비꽃 이미지는 '선택의 순간'에 등장했다가 색도를 하나 더 올려 '제비꽃과 회오리'에서 재등장한다.

권순왕_제비꽃과 회오리 Violet and whirlwind_ 캔버스에 유채, 아크릴채색, 목판화 콜라주_116.8×91cm_2022

판화로 재현된 튜울립과 제비꽃이라는 이미지가 머금은 시간과 자유롭고 경쾌한, 청량감을 주는 상쾌한 붓터치에 의한 드로잉 혹은 페인팅에 의한 이미지가 스쳐가는 시간은 서로 다르다. 판화 속의 시간은 잠복과 발현을 반복하는 시간이다. 과거와 현재를 다 담고 있는, 눅진하게 고인 시간이다. 페인팅의 시간은 오롯이 즉발적인 현재의 시간이다. 하나의 작품 속에서 고인 시간과 흘러가는 시간이 양립하고 있다.

권순왕_청색통로 Blue passage_ 캔버스에 유채, 아크릴채색_91×72.5cm_2022

판화는 판에 고인 시간을 길어내어 종이 위에 현재형으로 전사시키는 작업이다. 회화는 스쳐가는 현재의 시간들을 중첩시키는 작업이다. 고인 시간은 공간에 재배치하기가 용이하다. 고인 시간은 시간의 고유한 속성인 변수(變數)적인 성격을 떠나 상수(常數)로서의 공간이 되려는 시간이다. 흘러가는 시간은 장소 속에서 사건으로 진행되는 시간이다. 시간의 본령을 잘 유지하고 있는 변수로서의 시간이다. 상수의 시간은 상수의 이미지를, 변수의 시간은 변수의 이미지를 담는다.

상수로서의 이미지는 끈질기게 동일성의 자기복제를 반복하려 한다. 변수로서의 이미지는 동일성을 벗어나 일탈과 진화를 꿈꾼다. 통합된 상태의 환원을 통해 조형의 기본요소를 발견하고 이 요소들을 다각도로 결합하여 새로운 구조로 재통합된 조형을 만들어 무한대로 증식시켜가는 실험, 이 끝없는 실험의 현장에 권순왕의 프레인팅은 서식하려 한다. ■ 황인

Vol.20220903i | 권순왕展 / QWONSUNWANG / 權純旺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