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끄러운 테이블_1001 Smooth Table_1001

허민희展 / HURMINHEE / 許民喜 / painting   2022_0923 ▶ 2022_1018

허민희_제곱센티미터_나무패널에 아크릴채색, 연필_27.3×22cm_2020

테이블 토크 / 2022_1001_토요일_07:30pm

주최 / 복합공간 소네마리 후원 / 수유너머104_네오룩

관람시간 / 12:00pm~07:00pm

복합공간 소네마리 SONEMARI 서울 서대문구 성산로 315 후문 수유너머 1층 Tel. +82.(0)10.7920.7950 www.nomadist.org

균형의 역설 - 기하학적 풍경 너머 ● 빛-시선의 광학을 따라 원의 형태는 달라진다. 광원은 드러나지 않는다. 빛은 캔버스 너머 바깥에 있다. 그림 바깥에 혹은 그림 속 어딘가에 광원은 암시되어 있다. a-a'-a"....따라나오는 반복의 이미지들이 상상된다.신체가 없다. 신체가 주는 물성이 느껴지지 않는 냉정한 점, 선, 면의 세계. 사물과 신체적 형태가 없는 기학적인 풍경 앞에서 우리의 감각은 잠시 멈춘다. 시선은 무엇인가 포착하고자 한다. 사고가 시작된다.

허민희_제곱센티미터_나무패널에 아크릴채색, 연필_27.3×22cm_2020

허민희 작가의 기하학적 풍경 속 선형적, 비례적 세상은 정지되어 있는 것 같지만 숫자와 방위, 도형의 기호들이 만들어내는 고요한 흐름들이 서서히 드러난다. 점과 선이 만드는 평면의 공간 속에서 색채의 사용은 절제되어 있다. 컴퍼스와 자로 미리 계산되어 작도되었을 것 같은 선, 단순한 도형...하지만 계획에 따라 선택되고 계산된 이미지로 작업이 완성될 것 같다는 예상이 빗나간다. 작가에 따르면 작업을 시작할 때 우연의 과정에서 이미지가 선택되고 배치된다. 의식된 사고가 아니라 무의식적 우연의 행위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떤 생각이 들어와서 이미 존재하는 혹은 생성 중인 이미지와 어떻게 상호작용하는가에 따라 주제와 형식이 변하게 된다. 보여지는 작품에서 유추해보게 되는 과정과는 다른 의외의 이야기이다. ● 수학은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기호(symbol)를 사용한다. 회화도 어떤 면에서 동일한 선상에 있다. 기호체계는 인간 사고의 새로운 표현 형식을 형성하는 데 있어서 직관을 돕는다는 점에서 무한한 힘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회화의 이미지 또한 언어를 대신하는 혹은 넘어서고자 하는 기호-형식일 것이다.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것, 말해질 수 없는 것들을 이해하는 형식, 그것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작가는 고유한 자신만의 스타일을 만들게 된다. 허민희 작가는 점, 선, 원, 숫자라는 기하학적 도구로써 그의 이미지-형식을 만들고 있다. 그리고 그만의 동그라미-이미지와 이응-언어가 어떻게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지 또 관객들은 어떻게 읽어내는가에 작가는 귀울이고 다시 작가의 고유한 스타일로 생성되게 될 것이다.

허민희_제곱센티미터_나무패널에 아크릴채색, 연필_22×27.3cm_2020

균형의 역설 ● 인간관계에서 왔던 작가 개인적 고통의 경험은 2016년을 기점으로 작가가 자신의 작업에 집중하고 방해가 되는 요소들을 제거하면서 작업을 할 수 있게 했던 추동력이 되었다. 그리고 최근까지 '관계'는 계속 중요한 주제가 되어왔다. 한편 이번 전시 속의 작품들에서 어떤 균형감각은 표면적으로 드러난다. 대칭적인 표식, 비례적이고 선형적인 선과 도형들. ● "내가 생각하는 관계의 모습은 관계의 저울추를 재조정해서 끊임없이 균형의 영점(0)을 찾는 것이다"라는 작가의 말을 들으며 작품 속의 균형감각 그리고 관계에 있어서 균형(0)에 대한 애착이 가지는 상관성과 함께 어떤 역설을 떠올렸다. 영점(0)은 이상적인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수학에서 빈칸의 기호인 0은 오히려 변화의 기호이며 무상의 기호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균형의 영점(0)은 변화의 기호이다. 변화의 특이점을 이루는 허상의 한 점. 관계는 불균형적이고 비대칭적이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다. 또 끊임없이 균형을 이루고자 하는 상반된 힘의 역동성이 함께 공존하는 것이리라. 균형과 변화가 0의 서로 다른 얼굴에 지나지 않음을 기억하자. ● 운동과 변화, 흐름의 세계를 포착하고 표현하는 것은 곧고 평평하고 일정한 것으로 이루어지는 선형의 비례적 세상에서 나온 것들이 없다면 불가능하기도 하다. 작가의 지난 일련의 작품들이 보여주는 선형적, 비례적 기학하적 풍경 속 잠재된 운동의 흐름에서 특유한 형식의 변화의 흐름, 운동의 선으로 특이점을 그리는 또 다른 풍경을 기대해본다. 작품은 해석을 찾고 있는 하나의 상태이다. ■ 이유정

허민희_light drawing-north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연필_90.9×65.1cm_2018

습관적 습관 ● 지친 나그네를 융숭히 대접하고 침대까지 내어주는 도적이 있었다. 그러나 도적은 침대의 길이에 대한 병적인 집착이 있었다. 나그네의 키가 침대보다 크면 큰 만큼 다리를 잘랐고 작으면 잡아 늘렸고 딱 맞으면 노예로 부렸다. 자신이 정한 기준에 모든 것을 맞추려는 인간의 습관을 신화 속 도적의 이름을 따라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라고 부른다. 사상, 인종, 종교가 다르다고, 권력에 거슬린다고 자행된 마녀사냥에서 홀로코스트에 이르기까지 인간 흑역사의 단골 소재였다. 역사를 통해 배운다고? 인간의 자멸을 향해 비인간에게 저지르는 온갖 폭력은 그 말의 거짓됨을 증명한다. 흑역사를 통한 성찰은 개뿔이고 오히려 자만의 덫이 되었다. 적어도 그때보다 진보했다는 자만에 빠져 너도나도 가는 길 재촉하며 살던 대로 살아간다. ● 면적은 같지만 모양은 제각각인 도형들이 그려진 작품 앞에서 가장 먼저 대가들의 유명 작품들과 대조하기 시작했다. 어떤 작품과 얼마나 닮았는지 비교하는 습관이 발동했다. 얼추 유사한 작품들이 스치기도 했지만 이건 색이, 저건 구성이 다르다. 낯선 작품이 발산하는 불편을 해소하려면 어디라도 닮은 대가의 그림이 필요했다. 왜냐고 묻는다면 습관이라 답할 밖에. ● 억지로 레오나르도의 비트로비우스적 인간을 불러냈지만 이 역시 편치 않다. 백인 남성을 표준으로 삼은 저 '완벽한' 신체 형상은 성별, 종별 신체의 등급화를 통한 차별과 배제의 기제로, 욕망의 대상으로 지금까지도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장고 끝에 악수다.

허민희_moonlight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과슈, 흑연_97×130.3cm_2020

도형의 구상화들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일까? 결국 본질은 같다는 통속적인 결론을 위해 면적 구하기에 애썼다면 아쉬움이 남을 수도 있겠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닮은 쌍둥이가 존재한다고 해도 그들은 완벽한 별개의 개체들이다. 동일성을 추구하는 모든 노력의 종착지는 허탈이지만 모두에게 동일할 수밖에 없는 하나가 있다. 모든 관계가 차이와의 관계라는 점에서 모든 존재는 동일하고 평등하다. 사람도 사물도 사회도 그러하다. ● 빛과 그림자의 은유로 짐작되는 몇 작품은 차이와의 관계를 암시하는 듯하다. 사물과 빛의 배치에 따라 그림자의 길이와 면적은 달라진다. 작가의 작품 한 점은 탑승한 비행기의 움직임에 따라 창으로 들어온 빛의 변화하는 각도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빛과 비행기와 작가의 삼각관계는 그중 한 요소의 움직임만으로도 무수한 모양의 삼각구도를 만들어낸다. 그 중 어떤 하나를 콕 찍어 관계의 본질적 구도라고 말 할 수 있을까?  ● 인간은 같음과 다름의 구분을 통해 생존을 도모해왔다. 그러나 나만의, 우리만의 생존을 위한 이분법은 배제와 추방의 씨앗이었다. 공통분모의 크기로 사이를 가늠할 때, 원근법적인 고정된 주체는 시선의 폭력을 통해 공통분모를 선별하는 기준을 자처한다. 바로 내가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다. 기준에 대한 집착이 자기 소외의 원인이다. '관계 속의 변화'인 삶 속에서 자기 모습만을 고집하는 의意의 분별이 자기 소외를 일으켜 고苦로 나타난다는 것은 금강경의 가르침이기도 하다. 차이가 불편할수록 사이는 멀어지고 사이의 말단은 괴물의 서식지가 된다. 차이 소거의 불가능성 앞에서 서로는 서로에게 얼마만큼의 괴물일 수밖에 없다. 모면할 수 없는 사태 속에서 괴물끼리의 동맹을 유지하는 길은 막연한 '사이좋게'보다 '차이좋게'가 더 구체적이지 않을까? 허민희 작가의 전시 『동그라미와 이응』은 다시금 차이를 성찰하게 하는 전시였다. ■ 정일영

동그라미와 이응 ● 나는 지금 며칠째 『매끄러운 테이블』 전시 서문을 쓰는 중이다. 나는 생각을 말이나 글로 표현하는 것을 잘 못하는 편인데, 특히 내 미술 작업에 대한 글을 쓰는 것을 더 어려워한다. 전하고자 하는 바를 정확히 짜임새 있는 글로 만드는 행위는 정말 그림을 그리는 것보다 몇 배는 어려운 작업인 것 같다. 워드 프로그램 앞에서 괴로워하던 중 소네마리에서 보내주신 『매끄러운 테이블』의 취지를 설명하는 글을 읽어봤다. '예술과 철학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로 시작하는 이 글의 편안하고 간결한 문체에 감탄하고 아름다운 내용에 감동하던 중에 마치 '네가 글을 못쓰는 건 이상한 게 아니야'라고 말해주는 듯한 깊은 위로를 받고 나서, 단어 하나하나를 골라가며 쓰던 걱정 어린 전시 서문을 지워버렸다. 그러고 나서 전시의 제목을 '동그라미와 이응'으로 바꿨다. 전시의 제목을 바꾸면서 이 전시가 내게 갖는 의미가 명확해졌다. ● 나는 동그라미와 이응, 두 개체의 서로 다른 속성과 같은 모양에 주목하고 생각을 시작했다. 동그라미와 이응은 서체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매우 비슷한 모양을 가진다. 하지만 동그라미는 그림 또는 기호로 불리고 이응은 한글 자음으로 불린다. 이 둘의 관계가 『매끄러운 테이블』에서 말하는 예술과 철학의 관계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모양은 같지만 속성이 다르고 속성은 다르지만 모양이 같은 동그라미와 이응의 관계를 작가인 나와 관객들의 관계와 같은 선상에 놓고, 둘의 대화로 완성되는 전시를 떠올렸다. 먼저 이 두 개체의 속성에 따라서 동그라미는 시각적 언어 그리고 이응은 문자 언어로 설정하고, 전시에서 나는 동그라미 언어에만 집중하기로 한다. 동그라미 언어에 속한 그림은 이응의 언어로 설명되지 않은 채 『매끄러운 테이블』을 통해 전시되는데, 이응의 부재로 인한 영향을 예상하긴 이르지만, 그 결과가 부정적일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작품을 대하는 사람들이 동그라미를 표준화 또는 규격화할 수도 있는 이응에 갇히지 않고 자유롭게 그림을 해석할 수 있을 것이고, 자생적인 이응의 언어로 많은 대화를 하게 될 거라 생각한다. '동그라미와 이응' 전시를 통해 나누게 될 이응 언어의 대화는 내 생각의 범위를 훌쩍 넘길 만큼 다양하고 방대하고 혹은 어려울 수도 있을 텐데, 이 경험은 나에게 생각을 확장하고 새로운 출발을 하는 계기가 되어줄 거라 생각한다. ■ 허민희

Vol.20220923h | 허민희展 / HURMINHEE / 許民喜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