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의 여러가지 빛깔, 바로크적 드로잉

Many Colors of Melancholy, the Baroque Drawing展   2022_1015 ▶ 2023_0205 / 월요일 휴관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참여작가 강주리_소윤경_우창훈_윤세영 이샛별_이승미_이주리_임현채

2022 무안군오승우미술관 기획전

관람시간 / 09:00am~06:00pm / 월요일 휴관

무안군오승우미술관 MUAN SEUNGWOO OH MUSEUM OF ART 전남 무안군 삼향읍 초의길 7 Tel. +82.(0)61.450.5482~6 www.muan.go.kr/museum

"비애는 일반적으로 앞으로 다가올 모든 불행의 예언가이다." (발터 벤야민, 『독일 비애극의 원천』 중에서) 요즘 점점 더 심각해지는 기후의 이상변화나 바이러스에 의한 팬데믹 현상은 인류에게 죽음과 멸망의 시간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는 어두운 사실을 일깨워준다. 이 멸망과 쇠퇴의 징후들은 어두운 세계로 조금씩 침몰하는 거대한 배와 같이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한 우리들에게 비참함과 슬픔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이러한 우울함은 최근에 환상과 광기, 기괴함으로 가득 찬 디스토피아의 세계를 그려내는 문학이나 영화, 회화, 미디어 아트 등에 지속적으로 어떤 에너지를 부여하고 있는 것 같다. ● 위기의 시대에 나타나는 단절과 연속의 갈등은 마지막으로 타오르는 불꽃의 화려한 정염과 그것의 소멸이라는 양면성을 바라보아야하는 사람들에게 우울의 감정을 스며들게 한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러한 우울에 오랫동안 침잠하면서 위기의 시대를 관조하고 세상의 중심이 비어있음을, 우주의 허공에 던져져 죽을 수밖에 없는 가여운 피조물의 심연을 극적으로 표현했던 대표적인 시기로 17세기 바로크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독일 철학자인 발터 벤야민은 17세기 바로크를 현대로 가져왔고 세계를 보는 하나의 관점이라는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독일 바로크 연극의 예를 들어 설명하면서 벤야민은 멜랑콜리를 개인의 주관적인 경험에 의해 자아의 무의식 속에서 생겨나는 상실에 의한 분리 혹은 통합의 수준을 넘어 하나의 문화적인 비유, 다시 말해 알레고리로서 나타나는 일종의 예술의 의지로 보았다. ● 텔겔그룹에 속하면서 쿠바의 실험적 문학의 세계를 펼쳐가는 세베로 사르두이(Severo Sarduy)는 "이제 바로크라는 말은 더 이상 의미를 갖지 않는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모든 것은 철저히 바로크적이기 때문이다."라고 선언한다. 스페인 언어권인 중남미뿐만 아니라 현대 문화 전반에서 감지되고 있는 '바로크 미학의 부활'이나 '네오 바로크'의 '새로운 공기'는 19세기 인상파 혹은 표현주의나 초현실주의 등 20세기 아방가르드와도 연계성을 지니면서 그 의미는 현대예술에 이르기까지 확장되고 있다. ● 요즘 들어 바로크 혹은 네오 바로크 경향은 미술 외에도 문학을 비롯해 건축, 영화, 패션, 디자인, 음악 등의 세계에 걸쳐 광범위하게 존재한다. 현대의 바로크는 한편으로 과거 위기의 역사적 현상들과 연결시키고 이율배반적인 모순을 내포하면서 그 초월성을 끝내 유예시키는 우울을 통해 끊임없이 다중적으로 접혀지고 펼쳐지는 주름처럼 변형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문화적 현상들로 보여 진다. ● 우리는 동시대 미술, 특히 젊은 작가들의 다양한 드로잉들로부터 이러한 흐름들을 감지할 수 있는데, '우울의 여러 가지 빛깔, 바로크적 드로잉'이라는 주제로 여덟 작가를 초대하여 이러한 경향을 살펴보기로 한다.

강주리_Vivarium #3_종이 패널에 펜_117×91cm_2022 강주리_Butterflies in Shadow Bo× #1_종이 패널에 펜, 117×80.5cm_2021 강주리_Aquarium #3_종이 패널에 펜_91×73cm_2022
강주리_The Collection #58-300_종이에 펜_31×39cm_2016 강주리_The Collection #51-300_종이에 펜_31×39cm_2016 강주리_ The Collection #16_종이에 펜_31×39cm_2016
강주리_Column Capital #2_종이 패널에 펜_65×53cm_2022 강주리_Birds #1_종이 패널에 펜_61×73cm_2022

강주리는 종말의 징후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유전자가 변형되거나 진화・증식된 나무와 식물, 연약한 곤충, 토끼, 개구리 혹은 로드킬 당한 유기견 등의 동물들을 마치 대홍수기에 노아의 방주에 태우듯 섬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신의 의지에 의한 것이 아닌, 이처럼 왜곡되고 괴이한 형상들은 자연이 파괴된 이후 살아남은 미래의 우리 모습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바로크의 바니타스 정물화를 연상시키는 그녀의 펜드로잉은 태어나자마자 죽음의 숙명을 지닌 피조물로서의 인간과 자연의 존재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작가는 또한 이런 바니타스적 이미지들을 패턴화하여 벽지의 장식처럼 복제 배열함으로써 자본사회에서 대량으로 반복 생산되는 상품들과 유비관계를 설정하고 있다.

소윤경_combination1_종이에 콘테, 파스텔_112×76cm_2018 소윤경_combination6_종이에 콘테, 파스텔_112×76cm_2018
소윤경_combination2_종이에 콘테, 파스텔_112×76cm_2018 소윤경_combination5_종이에 콘테, 파스텔_112×76cm_2018
소윤경_combination3_종이에 콘테, 파스텔_112×76cm_2018 소윤경_combination4_종이에 콘테, 파스텔_112×76cm_2018
소윤경_combination7_종이에 콘테, 파스텔_112×76cm_2018 소윤경_combination8_종이에 콘테, 파스텔_112×76cm_2018

소윤경 역시 대재앙이나 전쟁으로 인해 멸망한 아포칼립스(apocalips)적인 지구의 인간과 다른 생물들이 서로 콤비를 이루어 약점을 보완하며 생존하는 모습을 환상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디스토피아 세계에 남겨진 아이들은 개미나 사슴벌레, 땅강아지, 메뚜기 등과 같은 작은 곤충이나 쥐, 도마뱀, 벌새, 소라 등의 동물들과 상처 입은 몸으로 서로를 지탱하며 삶을 유지하는 힘겨운 내러티브를 지니고 있다. 예를 들면 부상당한 소녀 전사는 메뚜기 등에 업혀 있고, 날개가 부러진 박쥐를 한 어린 병사가 부축하고 있다. 젊은 시절 전투에서 다리를 잃은 늙은 도마뱀이 사춘기 소녀의 머리를 잘라주고, 보초 소년병이 전쟁 중에 죽음을 맞이한 거북이를 껴안고 잠들어 있다. 재앙과 전쟁이 일상이 된 시대에 피조물의 가여운 생존방식이 마치 벤야민이 이야기 하고 있는 바로크 시대의 비애극처럼 펼쳐지고 있다.

우창훈_숨은 현자들_캔버스에 유채_500×210cm_2022
우창훈_펜데믹 카오스_캔버스에 유채_500×210cm_2021

우창훈은 이주리와 다르게 다중적 다차원의 세계에서 발생하는 모든 인과적 운동과 사건과 운명들을 결정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미시적인 진동과 파장, 그리고 울림을 즉흥적으로 교감하고 이를 시각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의 회화에서 우주의 운동을 감지한(인식한) 주체(작가)의 몸으로 구현되는 입자의 파동과 부유하는 공간, 면의 진동과 중첩되는 기하학적 문양들(fractal structures)의 끊임없는 변화와 운동은 과잉된 곡선들의 교차와 함께 거대한 크기의 캔버스에 구현된다. 그러므로 그의 회화는 영자역학에 기반한 자신의 지식을 기록한 개인적인 도서관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윤세영_생성지점 Becoming Space_장지에 석채, 분채, 레진_648×260cm_2018~2022
윤세영_생성지점 Becoming Space_장지에 먹, 석채, 분채_160×280cm_2019

윤세영의 세계는 바다를 배경으로 김을 채취하고 톳이나 감태를 따며 삶을 살았던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작가 자신과 딸로 이어지는 자신의 태생과 관련된 삶과 연대를 기반으로 펼쳐진다. 작가는 자신이 새로운 생명을 잉태할 무렵 겪었던 할머니의 죽음에 대한 애도를 거치면서 비로소 이율배반적이고 상반된 두 국면을 함축하고 있는 바다의 알레고리를 이해하게 된다. 종이, 석채, 유리병, 잉크, 실로 구성되는 그녀의 회화와 설치작품은 탄생과 죽음, 빛과 어둠(심연), 생성과 소멸의 양면성을 관조하는, 어둠이기도하고 빛이기도 한 푸른 멜랑콜리의 나르시시즘적 관계망으로 나타난다. 이 멜랑콜리는 원래 인간의 무의식에 투사되어 자신의 일부를 이루는 본성이기도 할 것이다.

이샛별_녹색 에코2 Green Echo_캔버스에 유채_123×180cm_2017
이샛별_녹색 에코3 Green Echo_캔버스에 유채_123×180cm_2017
이샛별_인터페이스 풍경 interface scenary_종이에 아크릴채색_410×141cm_2014

이샛별은 독특하게도 파국의 징후와 이를 지켜보는 우울의 관조를 디지털 방식으로 구현한다. 인터넷 서핑을 통해 건져 올린 이미지의 파편들이 작품의 모티프가 되고 주제에 나타난 '인터페이스'나 '레이어' 혹은 그림에서 픽셀을 연상시키는 표현 등 디지털 세계가 펼쳐지는 방식들이 화면의 전개에 차용된다. 램이나 USB 직렬버스, 혹은 수많은 창이 열리면서 이미지가 확장되는 디지털 메카니즘이 제주 4.3 항쟁이나 세월호, 혹은 작가가 여행 중 직접 찍은 사진이나 자화상 등 단편적인 파편들을 한 화면에 봉합시키는 방식인 셈이다. 하지만 작가는 회화가 지니고 있는 평면, 물감, 붓 터치 등 전통적인 양식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데 그녀의 그림의 주조를 이루고 있는 빛과 어둠, 맥락이 붕괴된 형상과 사건들, 원시적인 숲, 혹은 인공적인 녹색의 폭력, 검푸른 우울 등으로 상징되는 디스토피아적 세계는 이러한 풍부한 회화적 요소를 통해 나타나고 있다. <인터페이스 풍경>은 파멸의 징후와 우연적 사건들이 마치 최후의 심판처럼 장엄하게 펼쳐진다. 4미터가 넘는 높이의 캔버스에 검푸른 단색조로 그려진 울창한 원시림이 구별이 힘들 정도로 탈색된 인간의 무리와 알 수 없는 사건들의 맥락을 뒤덮고 있다. 빽빽한 숲은 빠져나갈 길이 없는 인간의 운명처럼 느껴지며 화면 가운데 어렴풋이 보이는 유일한 출구는 망자가 마지막으로 건너는 루비콘 강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그림에서 인간과 사건, 그리고 자연의 조각난 시공을 연결해주는 인터페이스적인 주요 요소는 깊은 우울이다. 그림 전반에 흐르고 있는 검푸른 주조는 컴퓨터 화면의 블루라이트처럼 보이는데 그것은 마치 화려한 연극이 막을 내린 후 잔상으로 남은 우울의 디지털식 표현처럼 느껴진다.

이승미_장갑_장지에 채색_116×91×5cm_2021 이승미_이른겨울_장지에 채색_162×130×5cm_2021 이승미_그물_장지에 채색_116×91×5cm_2021
이승미_아침이 온다_장지에 채색_118×162×5cm_2021 이승미_심연_장지에 채색_130×162×5cm_2021
이승미_엄마의 기도_장지에 채색_162×118×5cm_2021

이승미 역시 피조물의 고유한 슬픔을 검은 바탕을 배경으로 푸른색 주름과 연약한 새의 형상으로 표현하고 있다. 「엄마의 기도」에서 생명을 위한 기도는 두 마리 봉황과 꽃들이 수놓아진 푸른 주름을 가진 드레스와 희고 작은 새로 상징화 되었다. 하지만 간절한 기도와는 달리 「그물」에서 이 작은 흰 새는 푸른 주름 속에 갇혀 있다. 그녀의 그림에 자주 나타나는 푸른 주름은 고려 불화에서 부처인 관음상이 걸치고 있는 옷의 주름을 연상시키는데, 이는 구체적인 형상이라기보다 슬픔에 대한 관념적이고 추상적 표현으로 느껴진다. 흰 새의 몸에 엉킨 푸른색 주조의 주름, 겨울 꽃, 나뭇가지는 슬픔과 분리되지 못하고 자신의 몸과 합쳐진 멜랑콜리를 의미할 것이다.

이주리_안착과 탈피에 대한 꿈_캔버스에 유채_150×150cm_2019
이주리_안착과 탈피에 대한 꿈_캔버스에 유채_194×130cm_2018 이주리_안착과 탈피에 대한 꿈_캔버스에 유채_194×130cm_2018
이주리_살다_캔버스에 유채_130×163cm_2019

이주리는 세속적인 모든 것을 벗어버린, 오로지 신의 피조물로서 인간의 적나라한 몸을 그린다. 그녀의 회화에서 인간의 몸은 서로 엉키고 뒤틀리면서 허공을 향해 끝없이 상승하거나 아니면 한없는 나락으로 하강한다. 인간 자신의 상승이나 하락의 의지와 상관없이 결코 풀리지 않을 엉킨 군상들의 몸은 신의 구원이 없다면 허공에 던져져 소멸되는 피조물에 불과할 것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 바로크적인 몸은 마치 마지막으로 타오르는 불꽃처럼 붉은색을 띠고 있으며 서로 뒤엉킬수록 역동하는 근육으로 더 없이 찬란히 빛난다. 그 아래로 이제 다 타고 재로 돌아가는 듯한 회색의 몸들이 보인다.

임현채_모두 안녕 하기를_종이에 연필, 아크릴과슈_110×240cm_2022
임현채_시간2_종이에 연필, 아크릴과슈_193.9×150cm_2019
임현채_생일축하합니다 시리즈_종이에 연필, 아크릴과슈_각 70×50cm_2022
임현채_생일축하합니다 시리즈_종이에 연필, 아크릴과슈_각 70×50cm_2022

임현채는 육아와 작가를 겸하는 자신의 일상을 현실적으로 그린다. 그녀는 아이가 가지고 놀던 장난감, 여행했던 기억, 가사노동 등 미시적인 삶들을 계속 집적시켜 거대한 덩어리로 만든다. 작은 장난감 블럭이나 고깔모자, 인형, 미니어춰 집과 놀이터, 감자 건조대 등이 점점 거대해지고 대신 꼬끼리, 숲, 탑 등 현실 속 커다란 대상들이 점점 작게 축소된다. 이 역설적인 대조법으로 구성된 무거운 삶의 덩어리는 매우 작은 힘점에 의해 위태롭게 지탱된다. 불안하고 낯설은 삶은 곧 가까운 미래에 붕괴될 것을 예고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파멸의 징후가 이처럼 육아와 가사노동을 기반으로 쌓아올린 작가의 애정 어린 삶의 대상들을 통해 구현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녀의 우울은 더욱 큰 생채기를 남긴다. 또 한편으로 무거운 삶을 지속시키고 있는 에너지에 대한 그녀의 따뜻한 유희와 비유는 그럼에도 삶이 유지되는 한 우울의 해독제로서 예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 이번에 초대된 여덟 작가들이 여러 가지 빛깔로 보여주고 있는 멜랑콜리로부터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지구가 위기의 시기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직면하는 것이 중요하다. 작가들이 재현하고 있는 디스토피아 세계의 우울이 던지는 알레고리의 의미를 회피하지 않을 때, 우리는 비로소 새로운 희망의 씨앗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 박현화

Vol.20221015g | 우울의 여러가지 빛깔, 바로크적 드로잉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