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sser 더 적게

박미화展 / PARKMIWHA / 朴美花 / sculpture   2022_1026 ▶ 2022_1203 / 일,월요일 휴관

박미화_양은 달려야 해요 The lamb should be running_ 마른 풀, 흙 조형_가변설치, 30×50×24cm_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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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주최,기획 / 아트스페이스3

관람시간 / 10:30am~06:00pm / 일,월요일 휴관

아트스페이스3 ARTSPACE3 서울 종로구 효자로7길 23 (통의동 7-33번지) B1 Tel. +82.(0)2.730.5322 www.artspace3.com

박미화의 조형 작업: 속절없는 존재를 연민하는"수수께끼처럼 알 수 없는 표정의 얼굴들부터 무심하거나 생각이 거세된 듯한 몸짓들이 혼재하는... 어느 날 우연히 들어선 공간에서 사무치게 느꼈던 삶과 사람에 대한 애착과 그리움 또는 그 속절없음에 대한 잔상들을 오롯이 새겨 넣고 싶다... 존재를 기억하는 것, 그 기억을 기록하는 것, 그것이 일상이다." (박미화 작가 노트) ● 꽃다지, 홀스타인종 수소, 태어난 지 3일 만에 엄마와 떨어져 고기로 길러졌다, 4개월 때 비육농장으로 팔려 가 몸집 키워 두 살 때 도축되었다(2021.8.10.)...L씨의 친구 청년, 고철 덩어리 배를 이리저리 기워 바다로 내보냈다, 선박회사는 서둘러 유족과 합의했다, 검찰수사는 없었다(1988)...문에 기록된 삶...딸을 문 위에 뉘었다, 작은 관이 도착할 때까지, 적어두었으면 한다, 당신들이라도 적어두었으면...내 딸의 이름은 카탸였다, 카튜센카...일곱살에 사망했다...미상 犬, 늙고 병들었다고 나를 공터에 생매장했어요, 누군가 발견해서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이틀 만에 무지개다리 건넜어요(2020).

박미화_Lesser展_아트스페이스3_2022

점심 후 다섯 대의 차에 실려 온 시신들이 땅에 묻혔다, 그중 한 대의 차에서 아기를 안고 있던 여인이 내던져졌다, 아기는 엄마의 젖을 문 채 죽었다(1942, 폴란드)...존 브라운, 59, 백인 목사, 노예 반대론자, 교수형(1859)...이수단, 중국서 위안부, 이름 빼고 한국말 다 잊어, 끝까지 한국 땅 못 밟고 선물 받은 인형을 아이라 여기며(2016)...소원이, 16개월, 입양된 지 8개월 만에(2020)...김귀정, 대학생, 10여 분간 천여 발 최루탄, 토끼몰이식 진압에 희생(1991)...라이카, 떠돌이 개, 최초의 우주여행, 스푸트니크 2호, 우주를 떠돌아다니는 관(1957.11.3.)...바르스, 리시치카, 발사 28.5초 로켓 폭발...프츨카, 무시카, 우주에서 하루 보내고 우주선 고장으로 숨지다(1960.12.1.)...도안 응이아, 6개월 아기, 빈호야, 베트남(1966)...쿠르디(2012-2015). ● 그리고 어서어서 캄캄하거라, 는 얼핏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에 이르기까지 말들이 빼곡한 공책이 10권도 넘었다.

박미화_Lesser展_아트스페이스3_2022

꽃다지라는 이름은 작가가 붙여준 것일까. 카튜센카와 그의 딸 카탸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그리고 아마도 사람들이 소원을 이루라고 그렇게 이름을 붙여줬을 소원이에게는, 떠돌이 개 라이카에게는, 빈호야와 그의 6개월 된 아기 도안 응이아에게는 또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리고 쿠르디는? 인터넷에 찾아보니 난민 아기라고 했다. 기사를 보니 기사를 본 기억이 났다. 그렇게 얼핏 들었던 것도 같고 본 것도 같은 일도 있었고, 이번에 처음으로 알게 된 일도 있었다. 예컨대 1957년 11월 4일 스푸트니크 2호와 함께 편도 우주선에 실려 우주로 발사된 떠돌이 개 라이카도 그랬다. 우주 경쟁이 치열했던 냉전 시대의 희생양이라고 했다. 르네 지라르는 모든 건전하고 건강한(?) 사회와 제도와 국가가 희생양 제도 위에 건립되고 유지된다고 했다. 적절한 시기에 적당한 희생양을 지목해 민중의 잠재적인 폭력성을 전가하고 해소하고 잠재우는 일에 제도의 운명이 걸려있다. 요새 말로 치자면 좌표 찍기와 프레임 씌우기를 제도의 본성으로 정의한 것이라고 해도 좋다.

박미화_지성소 Sanctuary_흙 조형 11점_2021~2

공책에 적힌 말들이 하도 많아서 작가는 아마도 그때그때 바로 찾아볼 수 있도록 포스트잇을 가장자리에 따로 붙여두었다. 혐오 범죄, 난민, 노동, 동물 밀렵, 인디언, 목포 6월 같은 글귀와 함께. 이로써 작가의 작업이 어디서 오는지를 알겠다. 작가는 존재를 기억하는 것, 그 기억을 기록하는 것, 그것이 일상이라고 했다. 이 말은 역사에도 그대로 적용이 된다. 역사가 꼭 그렇지 않은가. 역사야말로 기억하고 기록하는 일이다. 그리고 작가에게 일상이란 사실상 작업 그러므로 예술이기도 하다. 그렇게 기억하고 기록하는 일을 매개로 작가의 역사관이, 생활관이, 그리고 예술관이 하나로 만난다. 다르게 말하자면 작가의 작업은 역사적인 주제를 다루면서도 생활철학과 생활감정을 근거로 한 것인 만큼 생생한 현장감과 함께 공감을 얻고, 그 자체로 작가의 예술에 대한 태도와 입장을 반영한다.

박미화_지성소 Sanctuary_흙 조형 11점_2021~2_부분

주지하다시피 역사에는 큰 역사가 있고, 작은 역사가 있다. 다르게는 위로부터의 역사와 아래로부터의 역사가 있다. 정치사와 경제사와 사회사가 전자에 속한다면, 생활사와 민속사와 풍속사가 후자에 속한다. 다루는 서사의 종류도 다른데, 거대 담론과 이데올로기가 전자의 서술형식이라고 한다면, 후자의 서술형식은 신화와 설화와 민담의 그것에 가깝다. 여기서 작가의 서사를 어느 한쪽으로 범주화하기는 어렵다. 불쌍한, 작고 여린, 그리고 여기에 때로 이름도 없는(그리고 대개는 죽은) 존재들에 바친, 스케일로 보아 작은 역사와 미시 서사 그리고 생활사에 가깝지만, 정작 그 내용으로 치자면 정치적이고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현실에 대한 인식 그러므로 현실에 대한 자기반성적인 사유의 결과로 보이는 만큼 큰 역사와 작은 역사가 현실을 사는 구체적 실체인 개인 속에서 융합되는 경우로 보아야 한다.

박미화_Lesser展_아트스페이스3_2022
박미화_회랑 The Passage way_흙 조형 22점, 골판지에 젯소, 아크릴채색 1점_2021~2

그렇게 작가는 정치적이고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현실의 희생양에 관심이 많다. 작업을 통해 희생양을 기리고, 기념하고, 기억하고, 기록한다고 해야 할까. 희생양을 위로하고, 연민하고, 오마주한다고 해야 할까. 그 오마주의 대상이 무차별적이다. 사람과 동물과 식물에 구별이 없고 차별이 없다. 하나같이 희생양이라는 동질성을 얻고, 동류의식으로 묶여있다고 해야 할까. 그렇게 작가의 작업에서 개와 양과 고라니와 고양이와 새와 사람이 구별되지 않는다. 개와 양과 고라니와 고양이와 새가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고 사람의 표정을 짓고 있다. 나는 자연에서 왔다는 의미일까. 자연이 엄마라는 뜻일까. 엄마는 아기와 똑같이 강아지도 안고 있다(피에타). 엄마는 풀도 안고 있다(헌화). 피에타? 헌화? 하나같이 망자를 오마주한 것이 아닌가. 공감 그러므로 감정이입, 다시 그러므로 망자를 향한 사무치게 그리운 애착과 속절없음이 차고 넘쳐서일까.

박미화_회랑 The Passage way_흙 조형 22점, 골판지에 젯소, 아크릴채색 1점_2021~2_부분

언젠가부터 인류세란 유령이 떠돌고 있다. 인류의 적은 인본주의 그러므로 인간중심주의라는 의미로 읽고 싶다. 인류의 적은 인류라는 뜻으로 읽고 싶다. 그렇게 읽고 싶다기보다는 실제로도 그런 의미일 것이다. 여기서 작가는 적과 각을 세우기보다는 차라리 망자를 기억하고, 기록하고, 연민하고, 오마주하기로 했다. 그렇게 작고 여린 것들이 불러일으키는 연민이, 죽은 것들이 자아내는 사무치는 그리움이 작가의 작업에는 있다. 엎어진 아기가, 날개 부러진 새가, 무심한지 슬픈지 덤덤한지 내면적인지 모를 바닥에 던져진 얼굴이, 표정이, 얼굴도 없는 몸통이, 팔이, 다리가, 누워있는 기둥이, 기둥조차 없는 기단이, 깨진 유리창이 침묵으로서 증언하는 속절없는 아우라가 있다. ● 그렇게 작가는 공책에 적힌 말들(그러므로 사연들)을 하나하나 끄집어내 실체를 부여해준다. 흙을 빚어 형태를 만드는데, 전체적인 양감을 봐가면서 다만 표면에 저부조 형식으로 얕게 새김질해 흙덩어리 고유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무표정한 덩어리가 오히려 표정을 함축한다고 해야 할까. 그렇게 빚어 만든 흙덩어리를 가마에 굽지도 않았는데, 더 적게, 라는 주제 의식을 실천한다는 의미도 있고, 흙 자체로부터 표정을 그러므로 어쩌면 흙 자체의 본성을 끄집어내고 싶어서이다.

박미화_회랑 The Passage way_흙 조형 22점 중 1점_52×45×6cm_2021~2

미술사에 보면, 말년에 미켈란젤로는 형상 문제로 번민했다. 돌과 같은 질료 속에는 에이도스 그러므로 이미 그 자체로 완전한 형상이 숨어있어서 자신이 할 일이 없다는(창조가 무색하다는) 사실에 좌절했다. 작가 역시 흙의 본성, 흙의 에이도스를 감각적으로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래서 자기가 표정을 부여해주기보다는 흙 스스로 자기의 본성을 실현하도록 조력했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근작에서 흙 조형물은 흙 고유의 본성을 간직할 수 있었고, 심지어 전시가 끝난 연후에는 다시 흙 통으로 들어가 처음의 말랑말랑한 흙의 원형질 그대로 되돌려질 참이다. ● 이 일련의 과정을 통해 흙에서 나서 다시 흙으로 되돌아가는 존재의, 그러므로 속절없는 존재의 알레고리를 본다면 지나친 상상력의 비약이라고 할까. 속절없는 존재의 알레고리로 치자면 흙보다 더한 것이 재다. 그렇게 작가는 심지어 재로 그림을 그리기조차 한다. 흙에서 나서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재에서 유래했으니 다시 한 줌 재가 되어 흔적도 없이 흩어지고 마는, 이런 속절없는 재료로 속절없는 형상을 빚고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거기서 속절없는 존재가 속절 있는 존재로 전이되고 승화하는 것을 본다. 죽은 것들이 말을 하는, 말을 하면서 사람들을 움직이고 흔들어놓는 역설을 본다.

박미화_Lesser展_아트스페이스3_2022

한편으로 공책에 빼곡한 말들은 신문지에 그린 일련의 드로잉에서 또 다른 형식을 얻는다. 신문지 위에 덧칠하고, 연필로 눌러 쓰고, 그 위에 다시 커터칼로 새김질했다. 이중으로 눌러 쓰고 새김질한 것인데, 쓰면서 기록하고, 재차 칼로 새기면서 그 말의 의미 그러므로 상처를 새겨넣은 것이다. 쓰는 것도 기록이고 상처도 기록이지만, 상처가 쓰는 것 그러므로 기록된 역사보다 더 오래 살아남는다. 흔히 역사는 남지만, 상처는 다만 시간이 지나면 잊힌다고 한 속설을, 여기서 작가는 뒤집고 있다. 더욱이 상처는 역사보다 더 생생하고, 더 깊고, 진정성이 있다. 그렇게 역사는 때로 의심하게도 하지만, 상처는 몸에 아로새겨진 것이므로 추억으로, 분노로, 그리움으로, 폭력으로, 슬픔으로, 무의식으로, 다른 주체로, 흔적으로, 자국으로, 연민으로, 징후로, 증상으로, 알 수 없는 수수께끼로 갈아타고 변신하면서 계속 살아남는다.

박미화_누워있는 천사 A lying angel_조합토, 산화소성, 아크릴채색_24×68×52cm_2022

그렇게 역사를 새기고, 상처를 새기고, 그리고 어쩌면 작가 자신의 다짐과 의지를 새겨넣은 일련의 드로잉이 360점의 모자이크로 모였다. 역사적 현실을 기억하고 기록하고 기념하는 아카이빙 작업이라고 해야 할까. 작고 여린 것들의, 죽은 것들의, 속절없는 것들의, 이름도 없는 것들의 역사를 세우는 기념비적인 성격이 있다고 해야 할까. 천에 한 땀 한 땀 바느질하면서 텍스트를 새겨넣은, 2017년 후반에서 2019년 초까지 1년 반 동안 하루에 한 개씩 마치 일기처럼 쓰고 만든, 400여 개의 패널로 이루어진 종전 시리즈 작업의 또 다른 버전이라고 해도 좋다. 작업의 성격상 앞으로도 계속 덧붙여지고 확장되고 변주될 현재진행형의 작업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박미화_왕관 A crown_나뭇가지_31×42cm_2022

작가는 기쁜 이야기보다는 상실을 이야기할 때 더 공감이 간다고 했다. 밀란 쿤데라는 현대인의 삶이 비극적인 것은 비극이 부재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비극이 없는 것이 아니라 비극에 대한 감이 없다는 말일 것이다. 비극은 삶을 정화하고(아리스토텔레스), 죽음은 삶을 세척 한다(프로이트). 그러므로 어쩌면 상실 그러므로 결여와 결핍, 비극과 죽음에 대한 잃어버린 감을 되찾는 것, 존재에 대한 연민을 회복하는 것, 그러므로 타자를 맞아들이는 것(레비나스)이 인류세의 유령을 잠재울 수 있다. 좀 거창하게는 인류를 구원할 수도 있는 일이다. ■ 고충환

박미화_Lesser展_아트스페이스3_2022

더 적게, 더 깊게 ● 박미화의 작업은 한 덩어리의 느낌으로 밀려든다. 느낌은 순간적으로 다가오지만 한편으로는 오랜 소화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 눈으로 보는 것과 마음으로 알게 되는 것 사이의 시차 때문이다. 보는 이는 그가 만들어낸 형상들에 사로잡히지 않고도 가만히 응시할 수 있다. 응시가 끝나더라도 무형의 잔상이 남는다. 그 느낌을 분석하고자 여러 개의 출입구를 두드려보겠지만, 애초에 언어는 한없이 모자라고 대체로 부질없다. 그럼에도 이어지는 글은 박미화의 '더 적게(lesser)'가 어떻게 '적다(little)'의 비교급을 실천하고 있는지 들여다보고자 한다.

박미화_이름 The Names_신문지, 아크릴채색_336×630cm_2020~2

더 적게, 표정과 몸짓"공간 속에는 수수께끼처럼 알 수 없는 표정의 얼굴들부터 무심하거나 생각이 거세된 듯한 몸짓들이 혼재한다." (박미화 작가노트 중) ● 박미화식 이목구비를 가진 것들은 때로는 사람이고, 때로는 동물이며, 때로는 사람도 동물도 아닌 형상이다. 흙을 긁어내 만든 이목구비는 어딘가 어설프다. 눈을 뜨고 있지만 딱히 또렷한 것도 아니요, 공허한가 싶기에는 어딘지 모르게 온화하며, 슬픈가 하고 물으면 단호할 만큼 차분하게 슬프지 않다고 대꾸할 것이 틀림없을 표정이다. 모든 진리를 깨우쳐서 고고해진 무심함이 아니라, 어떤 상태도 끌어안을 준비가 되어 있는 품이 넓은 무심함이다. 언젠가의 작가노트에서 그가 "여행길의 어느 날 우연히 들어선 공간에서 사무치게 느꼈던 삶과 사람에 대한 애착과 그리움 또는 그 속절없음에 대한 잔상들"이라고 썼던 것처럼, 그 모든 잔상의 상태를 함축한 얼굴이다. 완연하게 기쁘거나 확실하게 비참한 얼굴을 갖지 않는 불확실성이 주는 상태는 깊다. ● 그의 형상들이 가진 몸짓 또한 그렇다. 새는 우렁차게 날갯죽지를 뻗지 않고, 그 기능을 잊은 지 오랜 듯 고이 접혀 있기만 하다. 양의 머리와 사람의 얼굴을 가진 네 발 달린 동물은 잠들었는지 길게 엎드려 있고, 새끼 말의 얼굴을 가진 생명은 영원한 안식을 맞이한 것처럼 모로 누웠다. 앞 얼굴과 옆얼굴을 동시에 가진 천사, 다른 존재의 품에 안긴 소녀. 이들은 모두 몸체를 펼치기보다는 웅크리고, 주저앉고, 누워있다. 그러나 원래의 제 크기로부터 잦아든 폼이 주눅 들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들은 오히려 누군가 다가와서 쓰다듬기를 허락하고 있는 것 같다. 그만큼 온유하고 강하다. 그리고 이때 불현듯 안식을 찾게 되는 이는 그 형상이 아니라 쓰다듬는 사람이다.

박미화_이름 The Names_신문지, 아크릴채색_28×21cm_2020~2_부분

더 적게, 굽기와 색 ● 그간 박미화의 작품은 특유의 은은한 색조를 갖고 있었다. 녹색이라기에는 청색이 돌고, 빨간색이라기에는 노란빛이 돈다. 녹음이 짙은 수풀이라기보다는 시들어 빛바랜 풀잎에 가깝고, 매끈하게 제 몸에 비치는 것들을 튕겨내는 광물 같다기보다 녹슬어 빛을 먹어버리는 철판 같다. 어느 색 하나 확실한 것이 없이 애매하다. 흙이 색을 먹고, 공기도 색을 먹고, 물기도 색을 먹었다. 색의 입자와 흙의 입자가 엉긴 지 오래인 듯 색은 흙 위에 차분히 내려앉아 있다. 그 모든 거친 표면에도 색은 아랑곳하지 않고 제 색을 드러낸다. ● 이처럼 박미화의 흙 작업에서 그 특유의 독특한 정서를 만들어내는 데에는 색이 큰 역할을 맡아왔다. 작가가 시간, 공기, 습도, 열기 등과 협업한 결과물인 색은 흙(조합토)에 여러 겹의 흙물(화장토)을 입혀가며 1200도의 고온에서 굽고 또 구운 시간의 산물이다. 가마에 들어간 흙은 제멋대로다. 흙 판을 넣기 전에는 온전했던 표면이 가마에서 나오면 터져있고 깨져있기 일쑤다. 그래서인지 작가는 '흙 작업이 관계에 관해 많은 앎의 계기를 주었다'고 말한 바 있기도 하다. 작가의 의지를 앞세우기보다 흙의 우연성을 포용하는 연습이 필요했던 탓이다.

박미화_Lesser展_아트스페이스3_2022

박미화는 여기에서 한 발 더 나간다. 원하는 만큼 굽고, 색을 내는 균형을 찾아왔던 작가의 의지를 자연의 순환에 자연스럽게 수렴시키고자 하는 시도가 그것이다. 굽지 않기로 해본 것이다. 구워서 그 성질이 바뀐 흙은 한번 만들면 지구상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언젠가는 인류세의 지층에서 그 형태 그대로 남아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 높은 보존성은 예술품의 가치를 확보하기에 충분히 안전한 요건이 된다. 그러나 작가는 어느 순간 그 보존성 자체에 회의와 의문, 모종의 책임감을 느끼기 시작했던 것 같다. ● 이때 그가 작가로서 벼려온 색의 기술을 과감히 내려놓는다는 것은 포기가 아니다. 오히려 작가로서 선보일 수 있는 원대한 제스처에 가깝다. 색이 없다는 것은 굽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굽지 않는다는 것은 언제든 흙으로 돌아가도 된다는 말이다. 색 없는 형상들은 미완성의 상태라기보다 작가가 그간 다져왔던 형태의 본질에 더 다가간 느낌을 준다. 흙에 고스란히 남긴 표정과 거칠게 굳은 표면은 작품의 선, 즉 작가의 선택을 더 부각시킨다. 꾸밈이 주는 만족감을 넘어선 진실에 한 층 더 가까워진 것이다.

박미화_Lesser展_아트스페이스3_2022

더 적게, 의도 ● 작품 사이의 느슨한 동질성이 박미화가 사용하는 재료에 통일감을 부여하기도 하지만, 그는 재료를 다양하게 변주하는 작가다. 그가 그간 다뤄온 재료는 흙, 나무, 합판, 종이, 골판지, 캔버스, 철판, 시멘트, 목탄, 아크릴, 먹, 과슈, 오일파스텔 등 몹시 다채롭다. 더불어 각각을 다룰 때 수행하는 작업의 방식도 굽고, 칠하고, 파내고, 긁고, 붙이고, 그리고, 자르는 등의 가변적인 공정을 요구한다. 이렇게 여러 재료로 창작을 해오면서도 작가의 특색이 한결같이 묻어나는 데에는 질감이 중요한 몫을 차지한다. 박미화가 일련의 재료를 '어떻게' 만나게 하느냐에 따라 그의 작품은 저마다의 비슷하고도 고유한 거친 표면을 갖는다. 이는 작가가 시각적으로 드러내고자 하는 관념의 물질성이 가지는 특성과도 같다. ● 그러나 이러한 작가의 의도는 다른 사물의 시간을 포용하는 것으로서의 의도다. 그의 선택은 결이 다른 주관성을 갖고 있다. 예컨대 박미화는 캔버스보다는 종이를 선호한다. 캔버스는 그 제작에 타인의 노동이 이미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작가와 재료의 만남이 투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편 합판이나 골판지를 사용할 때도 공장에서 나온 새것보다는 길에 굴러다니며 세상 경험을 마친 때 탄 나무판이나 골판지를 더 좋아한다. 아무도 원하지 않을 것이 분명한, 버려진 재료가 그의 마음을 조금 더 편안하게 만든다. 앞선 예시들은 노동과 환경에 관한 윤리적 차원의 메시지와는 다르다. 작가가 발견해서 활력을 불어넣기 시작한, 그야말로 그 사물의 삶과 작가가 어떻게 관계 맺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박미화_낙원 Paradise_조합토, 산화소성_60×50cm_2021

더 적게, 위계 ● 전시장에 놓인 박미화의 작품들은 공간의 가장자리에서 쭈뼛거릴 때가 많다. 전시장에 놓인 여느 작품들처럼 위풍당당하고 기세 좋게 호언하며 부피를 뽐내지 않는다. 그들은 다만 전시장에 머문다. 그만큼 관객 또한 함께 그곳에 머물 수 있도록 공간을 내어준다. 박미화의 전시에서 작품은 관객과 함께 있을 뿐 관객에게 자신을 강요하지 않는다. 해의 위치에 따라 중정에 드는 빛이 달라지는 교회의 회랑처럼 박미화의 형상들은 어느 한 벽을 나란히 공유한다. 때때로 설치에 드러나는 작가의 선택은 그가 가진 예술관을 대변한다. 작가가 형상들에 머물도록 제안한 방식에서 읽히는 것은 소박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존재에 관한 근본적인 존중이다. ● 존중의 태도를 확장하다 보면 결국 도달하게 되는 앎은 상호간의 연결일 것이다. 어쩌면 박미화가 선택한 '굽지 않는' 작업은 작가의 주관성이 가장 확대되었을 때, 이것이 오히려 가장 공공적인 경우가 되어버린 아름다운 예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그에게 굽지 않은 흙 작업에 순환의 요소가 들어있는지, 있다면 순환의 시작은 어디라고 보는지 물은 적이 있다. 그의 답은 당연 '시작을 알 수 없음'이었다. 온갖 광물이 들어있는 흙의 출처는 우주의 기원과도 같다. 재료의 기원을 알 수 없듯, 사람이라는 물질 또한 그 기원이 유달리 위대한 것도 아니다. 결국 우리는 그저 시간과 공간을 잠시 동안 공유했다가 흩어지는 존재다. 그런 짧은 점유의 시간을 가늠할 때, 그 안에서의 위계를 따지는 것은 확실하게 무용하다.

박미화_아기천사 A baby angel_조합토, 산화소성_38×34cm_2022

더 깊게, 관계"서대문 형무소의 독방이나 철암의 선탄장, 노르망디의 교회 지하 창, 그것들은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지만 내게는 같은 잔상을 남겨 놓는다." (박미화 작가노트 중) ● 상호 간의 연결, 위계 없음, 존중은 낯모르는 사람들이 스러지는 세상에 관한 작가의 관심과도 이어진다. 박미화는 그간 합판에 커터 칼로 새기고, 흙에 묘비를 남기고, 자수로 이름을 꿰매며 더 이상 세상에 없는 존재들을 기려왔다. 무수한 죽음의 기록은 역사라고 쓰고 문명의 비루함이라고 읽을 법한 제노사이드, 혐오에 윤리적 정당성을 부여한 페미사이드, 돈에 양심을 맞교환한 사건들, 약자들에 대한 무차별의 폭력 속 희생된 생명들의 것이다. 이와 연장선에 있는 360개의 신문지는 더 투명하고, 더 뾰족하게 그들의 이름을 살핀다. 사회의 진보에 관한 의심이 짙어질수록 필연적으로 그의 관심은 안타까운 죽음을 향한다. 추모의 마음도 물론이겠으나 누구든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언제든 악당이 될 수 있음을, 누군가의 나쁜 선택과 누군가의 선량한 마음을 미리 구별해놓지 않기를 되새기는 제스처다. 결국 사람이 다른 존재를 판단하지 않고 존중할 때에야 이름은 불릴 수 있다. ● 관계에 관한 오래된 생각 때문일까. 박미화의 전시에는 꽤 자주 창이 등장한다. 창이란 안에서 보면 안온하게 해주는 것이며, 밖에서 보면 실낱같은 연결의 가능성이다. 창이 철창이라면 그 역이 된다. 창은 낮은 곳에 있건, 눈높이에 있건, 밖을 가늠할 수 없는 위치에 있건 간에 없어서는 안 될 것 중 하나다. 창 없이 시간을 보내거나, 창 없이 공간에 머문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갇힌 사람이다. 누구도 안을 들여다볼 수 없고, 누구도 밖을 내다볼 수 없기 때문이다. 부서지고, 파괴되고, 상처 입은 존재도 창이 있다면 언제고 회복을 염원할 수 있다. 어쩌면 박미화의 창은 이미 죽고 잊힌 존재들에게도 그들만의 창이 있었기를 기도하는 마음일지 모른다. 예컨대 작가가 만나본 적도 없는 라이카(1954~1957)를 떠올리며 마음 아파할 때, 라이카에게 지구를 볼 수 있는 창이 생길지도 모른다. 물론 갇힌 마음에 빛이 새어 들어오도록 하는 창은 지금 살아있을 이들에게도 절실하다.

박미화_천사 2 An angel 2_종이에 나무 재, 젯소_30×24cm_2021

더 적게, 삶"나에게 있어 작업이란 마음을 기록하는 일이다. 잊지 않기 위해서, 오늘 보다는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 (박미화 작가노트 중) ● 올해 나는 박미화의 강화 작업실에 서너 번 들렀다. 갈 때마다 늦봄, 여름, 여름에서 가을로 접어드는 시기였다 보니 나누는 대화의 한결같은 내용이 무색하게 시간의 변화가 실감되었다. 요컨대 계절을 느끼러 강화에 다녀왔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화단의 수목이었다. 처음 갔을 때 작가는 맨땅이었던 곳에 이런저런 꽃씨와 묘목을 심었다고 했다. 다음의 방문에는 그것들이 얼마나 컸나 부러 눈여겨보게 되었다. 그다음의 방문에 그는 빨갛게 익을 준비를 마친 대추 몇 알을 대추나무 밑에서 줍고, 나무에서 따서 양손 가득 담아 주었다. ● '화식(火食)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었다'는 인류학자의 연구라던가, '화식이 있어 모든 문명이 가능했다'는 과학자의 말은 꽤 일리 있어 보인다. 문명에는 당연히 예술 또한 포함된다. 그렇다면 이 모든 과잉과 욕망의 원천이 불을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것에 있다는 말인가? 모든 죄악의 시발점을 화식에 탓을 돌리자마자 아연한 느낌이 든다. 여기서 불은 아주 인간적인 것이다. 인간적이라는 것은 욕망에 휩싸이는 것이며 그것을 다시 반성하기도 하는 것이다. 즉 불은 인간의 선택을 상징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점에서 박미화가 '더 적게(lesser)' 만든 새로운 작업은 차갑다. 작가의 손이 형상의 매무새를 만들어낼 때 닿았던 온기가 전부다. 이 차가움은 박미화가 흙이라는 물질과 관계 맺은 보다 순수한 만남이다. 그리고 그 만남은 작품의 완성으로 수렴되지 않고, 매 순간의 과정 안에서 순환한다. ● 일부러 빼지(minus) 않고 더 적게(lesser)를 살피는 박미화에게도 욕망은 있다. 그것은 진정하게 평범하고, 진정하게 보편적인 작업에 관한 더 깊어진 바람이다. ■ 박수지

Vol.20221026j | 박미화展 / PARKMIWHA / 朴美花 / sculp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