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211128d | 임선이展으로 갑니다.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제20회 우민미술상 수상작가展
후원 / 충청북도_충북문화재단_우민재단 주최 / 우민아트센터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일요일 휴관
우민아트센터 WUMIN ART CENTER 충북 청주시 상당구 사북로 164 우민타워 B1 Tel. +82.(0)43.222.0357/223.0357 www.wuminartcenter.org
임선이: 흔적은 오래 남을 것이다 ● 인간의 기억이라는 것은 영 믿기 어려운 것 같으면서도 죽도록 남아 끝내 지워지지 않는 것이라, 잊고 싶은 것이 있다 해도 포기하는 것이 좋다. 죽을 때까지 따라다닐 것이라면 특정한 기억의 형상을 만들어 가두어 두는 것도 좋다. 이를테면 다시는 날 수 있는 몸을 갖지 못하지만 깃털은 형형색색으로 아름다운 「몸을 잃은 새-다다른 곳」처럼 말이다. 둥글려진 깃털은 원래의 몸에서 그러했듯이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다. 푸른 깃털은 인간들에게 희망을 주는 파랑새였을까, 공작 깃털은 너르고 화려한 날개를 펴서 제 짝을 유혹했을까, 어두운 밤색 무늬의 깃털은 낮에는 자고 밤에만 일어나 동그란 눈을 뜨고 사방을 살펴보았을까. 깃털은 몸을 잃었으나 사바나의 초원 같은 땅 위 둥근 항성처럼 떠 있다. 임선이는 기억을 뭉쳐 응축의 형태를 만들었다. 기억의 깃털에 집을 주고 땅을 주었다.
새의 깃털을 붙이는 시간은 한 땀 한 땀 작가에게 허리와 목이 굽는 고통을 안겨 주었겠지만, 흐르는 시간이 육체적 반복으로 대체될 수 있다는 것은 대개 옳은 일이다. 어쩌면 이리도 고운 것, 너는 무엇이었을까, 하는 등의 달아나는 생각들이 원래의 동기에 덧입혀졌을 수도 있을 것이다. 작은 깃털은 작은 구형으로, 큰 새들은 큰 구형으로, 몸을 잃은 새들은 새로운 몸을 입고 다시 무엇이 되었다. 그것이 존재인지 부존재인지, 상실을 말하는 것인지 아직 있음을 말하려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돌고 돌아 모인 깃털들이 서로 모여 별처럼 둥글게 무리지어 있는 그 형태들은 살아있는 것과 죽은 것을 동시에 연상케 한다. 삶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들은 그것을 다루는 작가에 따라 어찌나 추하고도 아름다운지, 어찌나 교훈적이면서도 절망적인지 다 서술하기는 어렵지만, 이렇게 다양한 작품들 가운데 나는 임선이 작가의 형태를 마음에 담아 둘 생각이다.
예컨대 어미소와 송아지를 반으로 갈라 포름알데히드 수조에 담아 그 사이를 지나가도록 했던 데미안 허스트의 작품은 "알았어, 알았으니 그만해." 하는 진저리쳐지는 감상을 불러 일으켰고, 그는 다른 생물들을 대상으로 연작을 보여주었다. 뒤샹이 좌대 위에 변기를 얹어놓는 일은 다시 태어나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허스트가 소를 반으로 갈라 보여주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다. 미술계에서 글쓰고 일하는 사람이 이 무슨 무식한 발언이냐 할 수 있겠지만, 정말 그러하다. 해골에 진짜 다이이몬드 수천 개를 박아 넣는 아이디어도 전혀 새롭지 않으며 충분히 생각할 수 있는 일이다. 죽음을 죽음이라고 말하는 동어반복이니까, 몇 세기 동안 지속되어 왔던 바니타스(vanitas)의 전통을 비싸게 재현하는 일이니까 말이다. 그런 생각은 할 수 있어도 굳이 실행하지 않을 뿐이다. 이렇게 작가들이 죽음을 다루는 방식과 목적은 정말 얼마나 다른가.
반면 하얀 소금바닥 위에 설치된 샹들리에들이 한 순간씩 반짝이면서 꺼져가는 숨을 재현하는 것은 그 어떤 비유보다 아름답다. 이 작품은 몸과 마음이 숨을 다할 때 눈부시게 솟아오르며 반짝이는 것, 솟아올랐다가 금세 사라지는 것, 이 보편적인 죽음의 과정에 대한, 마지막 숨에 대한 재현인 것이다. 아름답지만 폐허이고, 빛이지만 어둠인 장면, 종국에는 모든 빛이 어둠으로 귀속되는 모습, 이 작품의 제목은 「녹슨 말-#기억하는 숨」이다. 샹들리에와 켜짐과 꺼짐은 형광등이나 LED등이 켜지고 꺼지는 것과 전혀 다르다. 왕관처럼 둥근 형태에 반짝이는 유리 장식들이 매달려 빛을 산란시키는 샹들리에는 어떤 장소에서나 주인공의 역할을 한다. 가장 중심에서, 다른 무엇을 비추어야 한다는 의무가 없다는 듯이 저 스스로 빛난다. ● 크고 작은 샹들리에들이 힘을 다 해 반짝이고 서서히 빛을 잃어가는 것을 반복하는 이 작품은 별다른 레퍼런스 없이도 삶의 어떤 순간을 불러일으킨다. 반짝였다 흐려졌다 하는 기억들과, 기뻤다 슬펐다 하는 순간들과, 그 모든 것이 반복되는 우리의 인생과, 밤이면 반짝였다 낮에는 사라지는 별들과, 정말 그렇다, 마지막 발화와 마지막 숨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새의 깃털과 반짝이는 샹들리에 같은 시적 은유의 세계가 생성된 곳에서 추락하지 않고 버텼던 작가는, 확고한 부재와 종말을 보여주는 사진 몇 장을 기어코 내놓았다. 「바람의 무게-여행자의 시간」이라는 제목의 이 사진 연작은 부재하는 이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자개무늬가 화려한 장롱과 그 앞의 성모상, 성모상의 손에 걸려 있는 묵주, 커튼 너머로 들어오는 햇살, 장롱 안에 정갈하게 걸려 있는 외출복들, 어떤 옷의 소매는 팔 길이에 따라 접혀 있고, 어떤 옷의 소매에는 생활에서 묻은 때가 보이며, 올이 한 줄기 삐져나와 손을 한 번 봐야 할 것 같은 이 옷들의 주인공은 이 자리에 없다. 사람의 형태대로 만들어진 옷에서 사람은 빠져나가고 형태만이 남았다. 빈 방의 바닥과 벽에는 주인을 잃은 가구가 치워진 흔적들이 배겨있다. 모든 장면이 부재와 부재의 흔적을 말하고 있다. 이 작품들을 보고서야, 아, 이 장면들이 이 전시 전체를 이끌어가는 힘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부재의 힘, 부재로 인한 슬픔의 힘이다. 임선이의 전시를 보면서 마음이 흔들리고 움직였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보통, 요즈음의 작품들은 마음보다는 머리를 요구하지 않는가, 하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작품으로부터 테스트를 당하거나, 놀림을 당하거나 하는 일은 너무 흔하여 이제는 더 놀랍지도 재미있지도 않다. 한껏 서사를 구성했어도 그것이 식당 입구의 모형 음식 같고, 기술력을 총동원해도 압도적인 무기력만이 느껴질 때 한 번쯤은 회의하게 된다. 미술은 앞으로도 살아남을 것인가?
자연물과 인간의 모든 행위에 신화적 기원을 부여했던 고대 그리스에서는 미술의 시작을 부재에 대한 그리움으로 보았다. 이른바 부타데스(Butades) 이야기가 그것인데, 도공이었던 부타데스의 딸이 처음으로 그림을 그린 사람이고, 그 아비가 처음으로 조각을 만든 사람이라는 이야기이다. 부타데스의 딸은 전장에 출정해야 할 운명을 가진 어느 젊은이와 사랑에 빠져있었는데, 내일로 다가온 이별을 슬퍼하며 동굴 안에서 함께 밤을 보내게 된다. 동굴 벽에 옆으로 기대 잠든 젊은이의 그림자가 모닥불에 비쳐 보일 때, 부타데스의 딸은 그림자의 실루엣을 따라 그의 얼굴을 그렸다.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를 연인의 얼굴을, 곧 사라지게 될 그리운 얼굴을 선으로 남긴 것이 그림의 시작이라는 이야기이다. 적어도 고대 그리스인들은 이 낭만적인 이야기 속에서 그림의 용도를 찾았다. 볼 수 없는 것을 보이게 하는 것, 더 이상 없는 것을 있게 만드는 것은 미술의 최초 기능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었나 보다. 또한 나는 그런 의미에서 임선이의 작품이 최근에 보았던 여러 전시들 가운데 유달리 마음에 남았던 이유를 찾았다.
임선이의 작품 속에서 마음에 남아 있던 혼돈의 기억들은 제각각의 형태를 가지고 균일한 땅과 드높은 하늘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한 때 곁에 있었던 사람을 쓰다듬는 대신에 갖가지 부드러운 새의 깃털을 만지고, 꺼질 듯 꺼지지 않던 마지막 숨을 기억하는 대신에 반짝이는 전등의 찬란한 산란이 심호흡을 한다. 사진 속의 부드러운 반사광이 모든 공간을 메우고, 끝이 없는 공허함도 저물어간다. 우리는 살아가며 생각지도 못한 부재를 경험하게 될 것이고, 종국에 우리 모두는 부재의 사람과 같은 길을 갈 것이다.
태어난 모두는 이전의 생명들과 마찬가지로 마지막 숨을 깜빡이며, 몸이 없는 깃털로 남게 될 것이라고, 이후의 사람들은 그 흔적을 오래 기억하게 될 것이라고, 임선이의 작품들은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 흔적들은, 불확실한 황혼이 가고 밤에 별이 뜨는 것처럼 언제나 돌아오고 오래 남을 것이라고. 그러니 삶이여, 망자들의 부재에 더 이상 흔들리지 말고, 신선한 대기 속에서 날아가는 새들의 울음소리를 듣고, 불분명한 세상 이치를 원망하지 말고, 자신의 종말을 향해 걸어가라고, 그 흔적들은 말해준다. ■ 이윤희
Vol.20221118h | 임선이展 / IMSUNIY / 任仙二 / install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