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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갤러리밈 엠큐브 프로젝트展
관람시간 / 10:30am~06:00pm
갤러리밈 GALLERY MEME 서울 종로구 인사동5길 3 3층 Tel. +82.(0)2.733.8877 www.gallerymeme.com
그녀의 가슴은 진주에 어울려요 - 배미정 작가론 ● 1. "아아 사랑하는 소녀들아 / 나를 보아 / 정성으로 몸을 바쳐다오 / 맑은 암흑 횡행할지나 / 다른 날, 폭풍우 뒤에 / 사람은 너와 나" (나혜석, 「인형의 가(家)」)
'사람'이 되고 싶었던 여자가 있다. 그녀의 바람은 단순했다. 그녀는 보이기를 원했고 들리기를 원했다. 하지만 세상은 복잡했다. 보여도 보이지 않는 척, 들려도 들리지 않는 척했다. 그러면 정말 그녀가 사람이 아니게 된다는 듯이. 그녀는 어둠 속에 잠겼다. 그녀의 윤곽은 흐려졌지만 그녀를 삼킨 암흑은 맑아졌다. 여자들이 사라진 자리마다 침묵이 고였다. 잠긴 문 안쪽, 부엌 한구석, 외진 길가, 깊은 숲속, 하염없이 흐르는 강물 아래. 그렇게 가라앉거나 휘발된 여자들의 노래를 들으려면 거센 바람을 일으켜야 한다. 강바닥을 뒤집어엎고, 나뭇가지를 흔들어 깨워 흩어진 숨을 모아야 한다. 우우우- 폭풍우 몰아치던 밤이 지나고 아침이 올 때, 비로소 웃음 짓는 너와 나.
배미정은 '아는 여자'를 그린다. 그녀가 '안다'고 말하는 범위는 폭넓다. 가깝게는 가족과 친구가 포함되고, 멀게는 과거에 살았던 이름 모를 여자들이 포함된다. 붓을 들면 그들이 다 함께 불려 나온다. 화폭은 발 디딜 곳 없는 여자에게 자리를 내어 주는 장소다. 그림은 또 다른 차원의 현실에 정성껏 마련된 '사람됨'의 무대다. 여기서 여자들은 서로의 안부를 묻고 안녕을 빈다.
바깥에서 잠근 문 안쪽, 바람 한 줄기 통하지 않는 부엌, 도와주는 사람 하나 없는 길가, 쥐도 새도 모르게 자취를 감추는 깊은 숲속, 속절없이 불어나는 강물 아래 여자들이 있다. 이것은 비유가 아니며 꿈도 아니다. 현실이다. 지워지고 밀려나고 떠돌던 그때 그 여자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멀리 안 갔다. 그녀는 여기 있다. 무화과나무가 되고, 강둑에 핀 꽃이 되고, 이끼와 버섯 포자가 되고, 시냇물에 날개를 씻는 새가 되어 우리 곁에 있다. 그녀는 내 마음속에 있고 내 자궁 안에 있으며 내 가슴과 엉덩이와 손발이 되어 삶을 이어 간다. 그녀는 나와 삶을 겹쳐 살아간다. 여자는 어디에나 있다. 다만 그녀를 보고 듣는 이가 없을 뿐. 죽음과 삶이 서로를 휘감아 오르는 「죽어버린 무화과 나무」(2022)처럼, 그녀의 죽음은 영원한 사라짐이 아니라 새로운 나타남이다. 살아 있는 이들 가운데서 되살아남이다. 그렇게 여자와 자연은 한 몸이 되어 순환한다.
2. "가을 해당 꽃 새로 뵈는 하늘에 / 부드러운 솜 같은 한 조각 구름 / 무슨 비밀 말 않고 가는 그것이 / 후에 뭘로 변할 줄 네가 아느냐 // 끝도 없는 넓은 들 눈 속에 묻혀 / 아무것도 안 뵈는 그 얼음 속에 / 뵈지 않는 무엇이 숨겨 있어서 / 봄에 어찌 될지를 네가 아느냐 // 부드러운 긴 머리를 틀어 올리고 / 입만 방긋 잠잠히 두 볼 붉히던 / 아직 뜯지 아니한 처녀 가슴에 / 감춰 있는 비파를 네가 아느냐 // 알 – 거든 나서라 막힘 헤치고 / 모든 준비 가지고 따라나서라 / 아름다운 새벽을 나서 맞어라 / 새때 새날 새일이 함께 오도다" (김일엽, 「알거든 나서라」)
배미정은 이면을 보는 여자다. 하늘에 떠 있는 구름, 꽝꽝 얼어붙은 들판, 마주 앉은 이의 닫힌 가슴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아는 여자다. 길을 걸을 때 그녀는 온몸의 감각을 연다. 눈을 크게 뜨고, 귀를 열고, 손을 뻗고 발을 내딛으며 수많은 여자를 알아본다. 「박제된 빛」(2021)처럼 여자가 웅크리고 앉은 구석구석, 시커먼 모퉁이마다 빛을 뿌리고 다닌다. 무지개색으로 펼쳐진 빛은 백 년 전 김일엽이 노래한 가능성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이 품은 무한한 아름다움이며, 말라붙지 않는 삶의 역량이다. 「무지개 짓는 여자들」(2022)은 그 가능성의 바다를 자유롭게 헤엄치는 여자를 보여준다. 얽매임 없이 물장구치는 여자를. 그녀는 막힘이 없다. 고립되지 않는다. 고여 있지 않는다. 미지의 흐름에 몸을 맡긴다. 바다와 하나 되었으므로 두려울 것이 없다. 애쓰지 않아도 순조롭게 이루어진다. 지나친 노동과 필사적인 저항에 소모되던 에너지가 제 갈 곳을 찾는다. 그녀는 풀려났다. 그래서 '쉬고 있는 여자들'이다. 푹 쉬며 회복하는 가운데 창조가 일어난다. 이제 사람들은 한 번도 보지 못한 세계를 보게 될 것이다. 한 번도 듣지 못한 노래를 듣게 될 것이다. 과거와 현재의 여자들이 함께 짓는 무지개는 미래의 여자가 타고 내려올 미끄럼틀이다. 그녀가 안전하게 이 세계에 착지할 수 있도록 닦아 놓는 길이다. 한편 「모자를 뜨는 여자」(2023)에서 뜨개질하는 여자는 사라진 여자들의 이야기를 엮어 튼튼한 모자를 뜬다. 인생에 시커먼 먹구름이 몰려올 때 혼자 비 맞지 말라고, 또 다른 여자를 위한 보호막을 만든다. 여자들이 주고받은 애정이 살아갈 지혜가 된다. 모자 뜨는 여자는 그 사실을 안다. 그녀 옆에는 더 어린 여자가 있다.
그렇다면 육아마저 의미가 달라질 수 있을까? 의무와 부담이 아닌, 인력을 생산하는 노동이 아닌, 자발적인 기쁨에 찬 육아가 가능할까? 「살아내는 순간」(2023)은 여자가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모습을 보여준다. 생명을 낳아 기르는 일이 이렇게 신비로운 일이었던가? 담담하고 흔들림 없는 여자의 얼굴에 시선이 멈춘다. 세상의 모든 잡음이 소거된 채, 여자와 아기, 둘 사이의 눈맞춤이 일어나고 있다. 아기를 안은 여자의 가슴과 어깨 주위로 황금빛이 뿜어져 나온다. 반면 음습한 숲에서 푸르스름한 기운이 번져 나간다. 하늘을 뚫고 나갈 듯한 나무와 억세게 자란 풀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때 깨닫는다. 그림에 감도는 평온은 아무런 긴장 없는 편안함이 아니라는 것을. 배미정이 포착한 것은 사는 순간이 아니라 '살아내는' 순간이었음을. 여자와 아기를 둘러싼 환희의 빛은 몸-기억이 불러낸 모든 여자의 강인한 힘이다. 그 공동의 힘이 죽음 가운데 생을 지키고, 위기의 한복판에서 다시 시작하게 한다. 살고, 살고, 또 살게 한다. 배미정의 그림이 지닌 아름다움은 이 힘을 근원으로 삼는다. 그리고 그녀가 짓는 웃음은, 이 땅에서 살다 간 무수한 여자의 포옹 같은 웃음이다. 그 포근함을 설명할 말을 찾다가 운 좋게 딱 맞는 표현을 발견했다. 에밀리 디킨슨의 시를 배미정과 그녀가 아는 모든 여자에게 바친다.
"그녀의 가슴은 진주와 어울려요, / 그러나 난 '해녀'가 아니었어요 – / 그녀의 이마는 왕관과 어울려요, / 그러나 난 관모 하나 없어요. / 그녀의 마음은 집과 어울려요 – / 나는 – 참새 한 마리 – 거기에 잔가지로 / 푸근하고 영원한 / 둥지를 엮지요." (에밀리 디킨슨, 「그녀의 가슴은 진주에 어울려요」) ■ 홍예지
Vol.20230215d | 배미정展 / BAEMIJUNG / 裵美貞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