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막식 / 2023_0221_화요일
관람료 성인 1,000원 / 어린이, 청소년, 대학생, 군인, 예술인 700원 단체는 별도 문의 / 특별전은 별도의 관람료 적용
관람시간 평일·주말· 공휴일 / 10:00am~06:00pm / 입장마감 05:30pm 월요일,1월1일,설/추석 당일 휴관
전남도립미술관 Jeonnam Museum of Art 전남 광양시 광양읍 순광로 660 Tel. +82.(0)61.760.3242~3 artmuseum.jeonnam.go.kr
고화흠, 이제서야 비로소 나의 백안白岸을 찾아 ● 전남도립미술관은 전남 지역의 작고작가를 발굴하고 연구해 그 발자취를 재조명하고 있다. 『고화흠 초대전: 이제서야 비로소 나의 백안白岸을 찾아』 역시 이 같은 우리 미술관의 지속적인 프로젝트 중 하나다. 전남 구례 출신의 작가 고화흠(高和欽, 1923~1999)은 전주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동경의 녹음사화학교 회화과에서 미술을 공부했다. 약 1970년대 이후부터 그의 유화 대부분을 이루는 「백안」 시리즈는 은백색의 물결과 바다 표면에서 일렁이는 그림자에서 나온 서정적인 색채를 특징으로 한다. ● 전시의 부제목인 "이제서야 비로소 나의 백안白岸을 찾아"는 그가 원광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로서 정년을 마치고 200자 원고지에 손수 쓴 「백안기」에서 따온 것이다. 퇴임 이후 "…나는 한편으로는 섭섭하면서도 또 한끗 마음이 설레었다. 그 설레임은 아마도 이제야 비로소 나의 백안을 찾아, 그 진실을 찾아 홀가분하게 여행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이었으리라…"라고 쓴 이 글에는 그의 작업 세계에 있어 백안이 얼마나 중요한 개념이었는지가 여실히 드러난다. 직역하면 하얀 언덕이라는 뜻의 백안은 사전에 원래 있는 단어가 아닌 고화흠이 창안한 것으로, 그가 머릿속에 그려온 이상향을 나타내는 것에 가깝다. 백안이 가시적인 상태가 아니라 언젠가 가봐야 할 그리움의 언덕, 허전한 마음 속에 묻어두고 다가올 진실을 기다리는 빈 자리라는 그의 표현에서 작업에 대한 그의 애정과 낭만이 묻어난다. ● 이처럼 고화흠은 작가로도 열정적이었지만, 교육자로서도 활발히 활동했다. 특히 그는 수채화를 통한 미술문화의 저변 확대에 힘썼는데, 본 전시에서는 이제까지 공개되지 않은 그의 수채화 작품들을 다수 공개한다. 뿐만 아니라 그는 섬유예술을 전공한 부인 김인숙 여사와도 예술적 여정을 함께 걸어가는 동지였다. 실제로 김인숙의 자수 작품들 중에는 고화흠이 밑그림을 그린 것들이 다수 있으며, 이 전시에는 이 작품들도 함께 공개된다. ● 이 전시는 일반적으로 연대기 순으로 나열되던 작가 회고전의 틀에서 벗어나, 예술가이자 교육자, 그리고 부인의 예술적 조력자이자 동지로 살았던 인간 고화흠의 다양한 면모를 들여다보고자 했다. "내가 백안 속에서 내 삶의 조각들을 줍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내 가슴 속에 백안이 유구하게 자리잡고 앉아 내 삶의 편린들을 거두고 있는 것인지.."라는 그의 말처럼, 고화흠 삶의 조각들을 하나 하나 꿰어 이루어진 이 전시가 관람객들에게도 비로소 그의 백안을 찾아볼 수 있는 자리이기를 바란다.
문화적 교감을 향해 – 고화흠의 수채화 ● 고화흠은 교육자로 활동하는 동시에 미술이 많은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기를 바랐다. 그가 1983년 전주에서 「한국수채신작파」를 창립할 당시에 "폭넓은 지역정서를 미술형식에 담아 주변 지역은 물론 전국적으로 문화적 교감을 이루는데 초점을 맞춰 최선을 다하고자 노력했다"고 말한 것처럼, 그는 「한국수채신작파」 활동을 교육자나 화가 그 자체로서의 작업 방향과는 다르게 설정하고, 수채화를 통해 미술문화의 저변확대를 꿈꿨다. 단순히 미술전문인과 화가로서 자신의 기량을 보이는 데에서 나아가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미술을 향유할 수 있기를 마음 깊이 바랐던 것이다. 이런 고화흠의 모습에서 미술로 교감하고자 노력했던 그의 면모를 찾아볼 수 있다. 이 같은 그의 노력은 후대에 "고화흠이 전북 수채화의 모태가 되었다"고 언급될 만큼 깊이 있는 것이었다. ● 한국에서 수채화는 회화의 기초 수련과정이라는 인식이 오랫동안 심어져 온 가운데, 유화의 성행에 밀려 큰 주목을 받지 못하던 장르였다. 그러나 수채화가 처음부터 주목을 받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수채화는 우리나라에서 1900년대부터 일본과 서양인들을 통해 유입되었고 특히 물의 번짐과 종이의 흡수성 등이 전통회화와 많은 부분 닮아있어 호응을 얻었다. 1920년부터는 초‧중등학교 도화시간과 조선미술전람회 등을 통해 점차 서양화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처럼 수채화는 서양화를 우리나라에 정착시키는 데에 선도적인 역할을 한 장르였고, 완전히 다른 서양의 회화를 받아들이는 데 있어 완충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함께하는 예술적 여정 – 고화흠과 김인숙 ● 고화흠의 부인이었던 김인숙(1926~2020) 여사는 1949년 이화여자대학교 자수과를 1회로 졸업했다. 그는 한 교수님이 직접 그림을 그리고 그 위에 수를 놓는 것을 보고 반해 자수를 선택했다고 했다. 학생 시절 전통적인 자수기법으로 작업을 시작한 그는 점차 화면에 다양한 재료를 붙이는 콜라주(collage)와 배경의 스티치 등을 통해 과감하게 현대적인 회화적 요소를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실제로 그의 작업 중에는 구상화와 추상화를 오가던 고화흠 화백의 영향을 받은 작품들을 다수 볼 수 있고, 그 중에는 고화흠 화백이 그린 밑그림에 자수를 놓은 것들도 있다. 유난히 여성 인물화에 능했던 고화흠 화백이 그린 밑그림은 김인숙의 손을 거쳐 다양한 색과 재료가 혼합된 현대자수회화로 탄생했다. 가정에서 여성들의 기능의 한 부분으로 여겨지던 자수가 현대자수로 발전하게 된 배경에는 이 같은 동료로서의 신뢰가 밑바탕이 되었다.
고화흠과 김인숙은 같은 예술적 길 위를 함께 걸어가는 동료이자 동반자였고, 그들은 서로에게 반려자 이상의 존재였다. 여성들이 대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에 결혼하는 것이 일반적이던 때에 그들은 함께 화실에서 작업하고, 예술가이자 학자, 교육자로서의 삶을 이어나갔다. ■ 전남도립미술관
Vol.20230217c | 고화흠展 / KOWHAHUM / 高和欽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