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언이유 不言而喻

옌청展 / YANCHENG / 严城 / sculpture   2023_0222 ▶ 2023_0227

옌청_양면(兩面)_청석_40×35×10cm_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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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23_0222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갤러리 마롱 GALLERY MARRON 서울 종로구 북촌로 143-6 Tel. +82.(0)2.720.4540 www.gallerymarron.com facebook.com/marron1436 blog.naver.com/marron-1436 @gallery_marron

옌청의 '불언이유(不言而喻)'의 조각Ⅰ. 프롤로그 ● 옌청은 중국에서 1979년 도입된 산아제한 정책으로 인해 보편화된 '한 자녀 가정'에서 부족함 없이 성장한 청년 조각가이다. 여느 삼십 대와 다름없이 디지털 환경에 익숙하고 트렌드에 민감하며, 뚜렷한 주관과 개성을 지녔다. 그러한 그가 작업에 있어서는 원시 예술과 같은 순수함을 갈망한다는 것이 다소 아이러니하게 느껴질지 모른다. 라캉에 의하면 인간은 금지된 것을 욕망한다. 옌청의 원시를 향한 순수한 열망, 그리고 논리와 이성이 아닌 직관에 의한 삶의 방식을 열망하는 것은 이미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는 뜻의 사자성어 '불언이유(不言而喻)' 는 옌청의 조각이 추구하는 궁극이다. 이는 그가 원시 시대 예술을 예찬하는 이유이자, 동시에 그가 지금의 미술에 바라는 태도, 구체적으로는 그가 오늘날 미술에서 가장 결핍되어 있다 여기는 지점이다. 조각가로서 작업을 이어오며 줄곧 '형상'으로 표현하는 것에 익숙한 그는, 동시대 미술 영역에 존재하는 '과잉 해석'을 경계한다. 언제부터 시각예술인 '미술(美術)' 이 문자의 서술없이 존립할 수 없어진 것인가라는 자조와 애석함이 담긴 물음을 던진다. 옌청은 인간의 예술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인식을 탐구하기 위해 원시 · 신화적 기호와 조각의 결합을 시도해왔다. 순수함과 직관성을 담은 조각을 매개로, 예술을 가장 순수하고 근원적인 상태로 회귀시키는 것이 그의 작업이 도달하고자 하는 지점이다.

옌청_날개_한백옥_40×23×5cm_2023
옌청_험상 狰_금속, 3d 프린팅, 색_60×53×17cm_2022
옌청_필방 毕方_금속, 3d 프린팅, 색_73×20×13cm_2022
옌청_용 龙_금속, 3d 프린팅, 색_50×70×15cm_2022

Ⅱ. 조각의 원천, 그리고 재배치 옌청은 원시조각과 아프리카 조각, 중국 한대(漢代) 석각예술을 레퍼런스 삼아 그 안에 담긴 원시성과 순수성을 동시대적 관점에서 재해석하는 작업을 선보여왔다. 그의 조각은 기존 이미지의 재구성 · 재편집을 통해 새로운 의미와 맥락을 이끌어 낸다는 점에서 니콜라 부리오(Nicolas Bourriaud)가 제기한 '포스트프로덕션(Postproduction)' 의 개념과 맞닿아 있다. 이는 동시대 작가들의 작업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편집' 혹은 '합성'과 같은 창작 방식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된 용어로, 부리오는 동시대 미술이 목표로 하는 것은 더 이상 '새로움'이 아닌 '이미 갖고 있는 것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로 전환되었다고 말했다. 지금과 같은 '정보 과잉 시대'에 모더니스트들이 절대적 가치로 삼던 '오리지널리티(originality)' 를 갈망하는 것은 신기루(蜃氣樓)를 쫓는 것과 같을지 모른다. 애초에 가당치 않은 목표라 한다면, 편집자(editor)와 같은 태도로 인류가 남겨놓은 '보고(寶庫)'에서 재조명되어야 할 것을 발견하고, 여기에 다시 동시대적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지금 시대에 더 적합하고 현실적인 창작의 방법이 아닐까? 앞서 언급했듯, 옌청은 원시시대 조각이 지닌 강렬한 '상징성', 아프리카 조각에 담긴 '주술성'과 때묻지 않은 '순수성', 그리고 중국 한대의 석각 예술에서 느껴지는 '직관성' 등으로부터 창작의 영감을 얻었다. 「비마(非马)」는 중국 고대의 상형문자인 갑골문에 새겨진 말의 문양을 모티브로 작가가 창조해 낸 괴수이다. 한눈에 말을 연상케 하는 형상을 하고 있음에도,'말이 아니다'라는 의미의 제목을 붙이면서 관객들의 곤혹감과 호기심을 일으킨다. 옌청의 조각에서는 한나라 시대 명장 곽거병의 무덤에 놓인 「마답흉노(馬踏匈奴)」 석상에서 느껴지는 웅대한 기백과 질박미가 느껴진다. 또한 한대 석조에서 최소한의 인위적인 가공과 절제된 기법으로 거대한 돌덩어리에서 자연스러운 형상을 이끌어 낸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중시하는 태도 역시 발견할 수 있다. 원시시대 예술의 기원에 대한 대표적 가설로는 '유희', '노동', '주술' 이 있다. 그중에서 조각예술은 감상을 위한 목적보다는 주로 실용적 위력을 발휘하는 주술적 의미로 제작되었다. 일종의 신과 소통을 매개하는 초자연적 힘을 지닌 수단이자 소통의 도구로서, 직설적이고 솔직한 방식으로 인간의 욕망을 표현해왔다. 옌청은 바로 이와 같은 원시 조각에 담긴 원초적이고 순수한 에너지를 물리적 볼륨과 힘을 지닌 조각이란 매체에 투영시킨다. '에둘러 말하기'로 시종 일관 관객들에게 난제의 수수께끼를 던지는 오늘날 미술의 소통 방식에 염증을 느낀 그는, 예술이 어떠한 이유에서 생겨났는지, 어떠한 목적을 갖고 발생한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그의 조각에 녹아든 원시 · 신화적 기호들은, 근원으로부터 너무 멀리 와버린 '지금의 예술'에게 다시 돌아가야 할 곳이 어디인지 귀띔해 주는 이정표와 같다.

옌청_무제 无题_금속, 3d 프린팅, 색_60×20×35cm_2022
옌청_비마(非马)-이것은 그 말이 아니다_금속, 3d 프린팅, 색_70×23×16cm_2022

Ⅲ. 하이브리드 조각 ● 옌청이 예술을 순수하고 근원적인 상태로 회귀시키기 위해 취한 또 다른 방식은 바로 '하이브리드' 이다. 통상적 의미의 '혼종성(hybridity)'은 이질적인 문화가 뒤섞여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내는 현상을 말한다. 이러한 속성은 지금의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 구조와 삶의 환경과 곳곳에 내재되어 있는데, 예컨대 메트로폴리탄을 터전으로 삼은 현대인들은 인공으로 조성된 공원을 '자연' 삼아, 빌딩으로 우거진 도시공간을 '숲' 이라 여기며 살아간다. 즉,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 자체가 하이브리드적이다. ● 그의 조각에 나타나는 혼종성의 또 다른 원천은 바로 원시미술과 고대신화이다. 동서양의 대표적인 신화인『산해경』과『그리스 로마 신화』, 그리고 고대 동굴벽화와 선사시대 조각에는 반인반수(半人半獸)의 형상이 공통적으로 등장한다. 각 문화와 시대에 따라 함의는 다르지만, 서로 다른 성질을 하나로 접붙임 한 모습에는 인간의 원초적 본능과 기상천외한 상상력이 동시에 담겨있다. ● 옌청의 조각에 나타나는 '혼종성' 은 두 가지 양상으로 나타나는데, 그중 하나는 바로 '산해경식(式)'의 결합이다. 기원전 3~4 세기경에 지어진 것으로 알려진 동아시아 '최고(最古)'의 신화 산해경 속에는 '인간과 동물'의 복합체, 그리고 '동물과 또 다른 동물'을 섞은 상상의 동물이 자주 등장한다. 이처럼 '이질적인 것들의 어우러짐'을 보여주는 그의 조각은 현재 눈앞에 당면한 절박하고 긴요한 문제들에 대한 해법을 제시한다. 허황된 이야기로 여겨지던 반인반수의 신화가 현실화되어가는 것을 목도하며, 앞으로 인류가 AI, 인공적인 생명체, 동물 등 모든 이타적 존재들과 어떻게 공생하며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사고를 이끈다. ● 그의 조각은 전통 조각과 같이 3차원의 공간 안에서 견고한 볼륨을 지닌 물질로서 존재한다. 조각이 지닌 고유의 속성에 신화적 기호를 더한 형식적 변용의 시도는 옌청이 취한 혼종성 전략의 두 번째 양상인 '기호와 물질의 결합'이다. 옌청은 신화 속 괴수(怪獸)들의 이미지로부터 상징적인 기호를 추출해 조각 안에 녹여낸다. 그리고 또 다시 여기에 기이하고 독특한 조형미를 지닌 태호석(太湖石)과 같은 물질과의 융화를 통해 원형과의 '불사지사(不似之似)' , 즉 '닮지 않은 닮음' 에 이른다. ● 옌청의 조각은 이와 같은 '혼종성'을 기반으로 비물질의 세계를 물질화한다. 그가 창조해낸 신수(神獸)의 형상 속에는 고대인들의 세계관과 주관적인 감정이 상징적으로 담겨있다. 그러나 이는 알 수 없는 자연현상과 사물을 가시화한 기호이기에, 현대인의 시각에서 그 안에 담긴 함의를 명확하게 파악할 순 없다. 그는 바로 이러한 모호함을 익숙하면서도 낯선, 닮은 듯 닮지 않은 '사여불사지간(似與不似之間)'의 형태로 표현한다. 이는 중국의 서화가인 치바이스(齊白石) 예술의 궁극으로, 그는 화가가 지나치게 '닮음'(似)을 추구하는 것은 세상에 아첨하는 짓이고, 반대로 어떠한 대상을 그렸는지조차 알아볼 수 없게 그린다면 세상을 속이는 것이라 주장하며, 예술의 묘미는 '그 사이 어디쯤'에 존재한다고 말했다. 옌청이 조각이라는 물질과 기호의 결합, 그리고 여기에 또 다시 태호석과 같은 대상이 지닌 물성을 더해 다다르고자 하는 지점 또한 바로 '그 중간 어딘가 즈음'에 자리한다.

옌청_夔牛-Mythical Animals Ⅲ(夔牛-신주Ⅲ)_수묵화水墨畵 50×50cm_2023
옌청_夸父-Mythical Animals Ⅱ (夸父–신수Ⅱ)_수묵화 水墨畵_50×50cm_2023

Ⅳ. 불언이유의 조각 ● 옌청이 원시 · 신화적 기호의 재배치, 그리고 서로 다른 성질들 간의 '혼종'을 통해 도달하고자 하는 조각예술의 궁극은 바로 '불언이유'의 경지이다. '말하지 않아도 안다'라는 의미의 사자성어 안에는 작가의 원시예술에 대한 동경과 연모가 담겨있다. 그는 원시예술이 그러했듯, 자신의 조각 또한 언어와 같은 소통의 매개가 되기를 희망한다. 프랑스의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는 1959년 미술평론가인 샤르보니에와 원시예술과 현대미술의 특징과 차이에 대해 나눈 대화에서, 선사시대 예술은 심미적 대상이기보다는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의미를 알고 있는 일종의 '상징'이자 '기호'로서 언어와 같은 역할을 했을 것이라 추측했다. 또한 선사 시대 예술의 목적은 집단의 삶을 유지하고 보전하는 것으로, 상징체계와 기호 속에는 당시 사람들의 염원이 담겨있다고 말했다. ● 옌청의 조각은 결코 뛰어난 손재주와 기교로 관객을 눈속임하지 않는다. 문자가 생겨나기 전 선사시대 창조물이 그러했듯, 에두르지도 애써 꾸미지도 않고, 본능적이고 직관적인 방식으로 의미를 전달한다. '불언이유의 조각'은 옌청의 예술관(藝術觀)이자, 동시대 미술을 바라보는 그의 태도이며, 나아가 이 시대를 향해 던지는 작가의 우려 섞인 목소리다. 20세기 중반, 레비-스트로스와 샤르보니에가 원시와 현대예술의 비교 분석을 통해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은, 자신이 속한 세계만을 객관적이고 실재적이라 믿는 소위 문명사회를 살아가는 인간의 오만과 편협함을 지적하기 위함이었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넘게 흐른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은 그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심각한 곤경에 빠져있다. 현대 인류문명은 '진보'와 '발전'을 기치로 내걸었지만, 어쩐지 가면 갈수록 잘못된 방향으로만 흘러가는 모양새다. 새로운 문명에서 도태되지 않을까 숨을 벌떡이며 모두가 앞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지금, 옌청은 오히려 '거꾸로 가기', 그것도 원시로의 회귀를 꿈꾼다. ● 이른바 '첨단 과학기술의 시대'로 불리는 오늘날, 인간은 자신의 손으로 만든 기계로부터 위협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과학발전은 인간의 삶에 편리함과 유익함 만을 가져다주는 줄로만 알았건만, 인간의 존재는 물론이고 전지구의 생태계까지 위기에 빠트려 버렸다. 어찌할 도리가 없는 지금의 현실 앞에서 작가는 '이렇게까지 편리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라고 반문한다. 물론 그가 모든 과학기술의 발전과 진보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며, 세상을 비참하고 불행한 것이라 여기는 소위 염세주의적 삶의 태도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지금까지의 세상이 계속해서 더 나은, 더 편리한 삶을 지향해왔다면, 2023년 현재 우리가 직면한 가장 긴요한 문제는 '어떻게 더 발전해 나갈 것인가?'가 아닌, '더 생존해 나갈 수 있는가?'라는 것을 각성시키기 위함이다. 이것이 바로 옌청의 '불언이유의 조각'이 우리에게 '멈추기'를 그리고 '뒤돌아 보기'를 권하는 이유이다.

옌청_刑天-Mythical Animals Ⅳ (刑天–신수 Ⅳ)_수묵화 水墨畵_50×50cm_2023
옌청_精卫-Mythical Animals Ⅰ(精卫–신수 Ⅰ)_수묵화 水墨畵_50×50cm_2023

Ⅴ.에필로그 ● 옌청은 '불언이유'의 조각을 추구하지만, 모순적이게도 그의 조각은 결코 보이는 것이 다는 아니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조각을 추구했지만, 돌아갈 수 없는 것을 알면서도 원시적 근원으로의 회귀를 꿈꾸었던 것처럼, 동시대 미술에서 '보이는 것이 다' 임을 추구하는 것은 이미 불가능해져버렸다. 예술을 가장 순수하고 근원적인 상태로 돌리고 싶은 그의 염원 또한 도달할 수 없는 판타지이다. 지금의 모습으로 진화해버린 인간이 문명을 접하기 이전의 인류와 같이 사고하기를 바라는 것은 애초에 어불성설이다. 하지만 그것이 가능치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여 조그마한 행동도, 목소리도 내지 않는다면, 문명의 이기심을 가속화 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다. 옌청의 '불언이유의 조각'은 표면적 의미 그대로, 흡사 원시시대 예술과 같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조각을 뜻하는 것이 아닌, 문명에 의해 때묻지 않은 '원시성'과 '순수성'에 대한 향수를 담은 메시지이다. ■ 조혜정

Vol.20230219b | 옌청展 / YANCHENG / 严城 / sculp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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