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1:00am~07:00pm / 일,월요일 휴관
스페이스 소 SPACE SO 서울 마포구 동교로17길 37 (서교동 458-18번지) Tel. +82.(0)2.322.0064 www.spaceso.kr @space__so
아이는 세상에 태어나 먼저 울고, 그다음에는 웃는다. ● 언어 이전의 인간에게 눈은 죽음과 삶을, 생명체가 마주한 양극단과 연결된 수많은 말단의 조건들을 설명하는 유일한 창구다. 선홍빛 조직들로 덮인 두 개의 구멍과 거기에 각각 한 알씩 담긴 구체 그리고 이를 보조하는 분비 기관 등은 맨 처음의 울부짖음과 미소를 시작으로 하루에도 수십번씩 울고 웃어대며 삶과 멀어짐이라던가 반대로는 삶 속에 완전히 존재함을 외친다. 갓난아이의 언어는 이렇듯 인간의 원초적인 생명성을 말한다. 사회적으로 합의된 용어와 문법을 획득하고 정밀한 의미 교환에 점차 익숙해지면서, 또한 생과 사의 문제가 수많은 다른 문제들에 가려 이전만큼 잘 보이지 않게 되면서 어느새 눈의 말은 명징함을 잃어가는 듯 보인다. 탄생의 기억을 상실한 이들에게 눈물과 웃음은 비언어적이고 비이성적인 감상의 영역에 내팽개쳐진다.
그런데 때로는 이 말라버린 태초의 언어가 불현듯 차올라 모호함의 영역을 찢고 흘러나오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한다. 이를 조금은 상냥하게 '초대'라고 부르도록 하겠다.
눈물에 초대되어본 적이 있는가? 영원히 이를 이해하지 못할 인물들이 있는가 하면, '따라 우는 사람'들에게는 눈물의 초대가 그리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잘 알지 못하는 서사를 두고 눈물 몇 방울에 완전히 무너져버린다는 게 이성적으로 받아들이기에는 조금 희한하다. 그런데 모든 가능한 경험에 우리가 반드시 이성적인 태도를 유지해야만 하는 이유라도 있는 걸까? 다발적으로 일어나는 사건과 현상들. 매번 성실히 경험해가며 익히고 암기하기에는 삶이 너무 짧다. 수도 없는 사회와 규율과 기호와 기술의 껍데기들로 스스로를 둘러쳤음에도 불구하고, 창대하고 괴이한 세상 앞에 인간의 몸은 너무도 무르고 헐벗었다. 직관적으로 상대의 세상에 입장하고, 미지의 감각에 빠르게 동기화한다는 건 혹여 지금껏 습득한 언어를 모두 잃을지라도 우리가 어떤 선천적 기민함으로 끝내 위기에서 회생하리라는 일종의 신호일지도 모른다.
전시 『나는 누가 울면 따라 울어요』는 그림을 통해 관람자를 다른 세상으로 초대한다. 김다정, 김혜원, 방소윤, 그리고 정주원은 각자의 방식으로 자신과 맞닿은 세계의 껍데기를 얇게 저며 회화의 표면에 옮겨낸다. 화면에는 마치 진짜 같으면서도 진짜가 아닌 극한의 감각이 만들어진다. 여기에는 끝내 정점에 도달하지 못한 데에서 오는 오차와 손실도 있다. 전시는 회화의 장르 안에서 전개되는 '모방된 세계'가 관람자의 직관으로 전해지는 순간을 다룬다. 더불어 화면을 두고 이루어진 동시대 작가들의 회화적 실천이 성취로 이어지기까지의 실험과 수행에 대해서도 살펴보려 한다.
김다정의 회화에서 우리는 공상과학적인 상상 속 모든 것들의 움직임을 본다. 쉽게 접근할 수 없는 딥웹 속 데이터 흐름, 뉴런을 오가는 전기 신호, 양자역학이 지배하는 미시세계, 혹은 어디가 얼굴인지 가늠하기 애매한 거대 외계인의 침공까지. 실로 목격한 적도, 달리 아는 바도 없지만, 전 세계가 밀레니엄 버그에 대한 공포에 휩싸인 이후 20여 년이 흐른 지금 누구나 쉽게 떠올릴 수 있게 된 장면들이다. 보이는 것과 달리, 김다정은 상상과 거리를 두는 편이다. 회화를 위한 '이미지 자동 생성'을 꿈꾸는 작가는 순수한 조형을 위해 수식을 전개하듯이 작업 과정을 엄격하게 설계한다. 그는 오랜 역사를 가진 구기 스포츠의 동세와 숱한 업데이트를 거쳐온 디지털 이미지 편집 프로그램의 기본값들을 빌려온 후 이를 화면비, 작품 소재, 선의 움직임 등에 적용하여 작업을 알고리즘화한다. 그리고 경기장에 들어선 플레이어가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경기를 보여주듯이 알고리즘의 빽빽한 규칙 사이를 유영하며 작업을 완성한다.
방소윤은 디지털 이미지를 이루는 무한의 입자를 손에 닿을 듯한 고해상도로 그려낸다. 디지털 필드에서 생성된 이미지 입자는 이미지의 탄생 출처를 밝힌다. 영어로 대화를 나누면서도 그에 묻어나는 모국어의 억양을 느끼고, 때로는 출신 도시까지도 알아낼 수 있는 것처럼 이미지를 구성하고 있는 최소단위가 어떤 질감을 보여주느냐에 따라 이미지가 어디에서 생산되었는지를 유추해볼 수 있다. 픽셀과 벡터 등으로 대표되는 2D 이미지, 복셀이나 폴리곤 등으로 모델링 된 후 렌더링을 거쳐 생성되는 3D 이미지들은 다양한 요소에 의한 질감 차를 표면에 그대로 투영한다. 방소윤은 이 질감을 갑자기 현실 세계로 끌어오면서 혼란을 야기한다. 작가에게 축적된 경험들은 아바타의 모습으로 여러 차원의 필드를 관통하여 회화에 도달한다. 차원 간 이동으로 생성 당시의 정보 값을 부분적으로 잃어버린 채 화면에 흩뿌려진 이미지는 진실한 삶이 더 이상 물리적 현실에서만 존재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김혜원 또한 작업을 위해 디지털 이미지 생산 기술의 힘을 빌린다. 그림의 도면이 되는 무미건조한 장면들은 핸드폰 카메라 기능에 의해 때와 장소에 상관없이 손쉽게 포착된다. 작가는 지극히 일상적인 소재와, 비율, 시점으로 이미지 자체에서는 철저히 모습을 숨기고, 대신 이미지 재현을 위해 취하는 표현 방식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고자 한다. 재현 방식은 견고한 논리에 따라 구조를 갖춘다. 우선, 장면에서 '본 것'과 '보인 것'을 분리하고, 3차원의 무대를 구성하듯이 이것을 개별의 레이어로 철저하게 분리한다. 배경으로 흘러간 부분은 화면에 스며들도록 하고, 반대로 초점이 닿은 대상은 마지 부조 작업을 하듯이 물질을 두텁게 쌓아 올리거나 심지어는 다른 겹의 화면을 가져와 덧대는 방식으로 띄운다. 계속해서 최적의 방도를 찾아가면서 김혜원은 시지각적 경험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해나간다.
동양화에 기반한 재현 방식을 취하는 정주원의 풍경화에는 사유와 현실이 한데 뒤섞여있다. 그는 아무런 도구 없이 자연을 거닐고 온몸의 감각으로 세계를 기억한다. 기억에서 꺼낸 풍경 속에는 뚜렷이 보이는 대상도 사건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풍경이 흐르는 시간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밤하늘의 별을 오랜 시간 비추어 찍어낸 사진처럼, 작가가 머물렀던 시간의 길이에 따라 수집된 반투명한 심상의 층위들은 서로를 포개며 겹겹으로 접합을 이룬다. 풍경 속 형체는 모호해지고, 장면을 이루는 조직들은 더 작은 조직들로 쪼개지며 흐르고 진동한다.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녹색 언덕」(2022) 중앙의 본 풍경을 주변으로 복제하고, 그림에 사용된 물질 중 하나인 흙에서 출발하여 「가짜캔버스」(2023)를 흙으로 빚어내거나 또는 아예 그림 속의 대상을 오브제의 형태로 꺼내오기도 하면서 정주원은 풍경의 경계를 흐트러뜨리는 일을 이어 나간다.
작가들이 그려낸 개별의 세계는 사각의 울타리를 곧 넘어설 듯 응집된 에너지를 머금고 일렁인다. 앞에 선 시선을 두고 잔뜩 팽창해있으면서도 끝내 말이 없이 고요함을 유지한다. 헤아림의 시간. 지켜보던 두 눈이 점과, 선과, 면과, 색을 바라보기를 멈추고, 이내 표면의 온 입자가 자신을 비추고 있음을 감지할 때 세계는 장막을 찢어내고 흘러내린다. 눈물이 되어 흐르는 세계를 초대에 당신은, 숨은 언어의 서술을 탐색해내려고 할 것인가 혹은, 못내 따라 울게 될 것인가. ■ 최수지
Vol.20230223e | 나는 누가 울면 따라 울어요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