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미술·빛을 찾아서

2023년 수성아트피아 재개관 기념 특별展   2023_0502 ▶ 2023_0528 / 월요일,5월 5일 휴관

초대일시 / 2023_0502_화요일_06:00pm

참여작가 곽훈_남춘모_이명미_이배_최병소

곽훈 작가 설치 퍼포먼스 / 2023_0502_화요일_05:3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5월 5일 휴관

수성아트피아 SUSEONG ARTPIA 대구 수성구 무학로 180 1,2전시실 Tel. +82.(0)53.668.1566 www.ssartpia.kr

수성아트피아는 2007년 개관 이래 다양한 전시기획으로 지역민들과 미술애호가들에게 주목받는 전시장으로 자리매김했다. 초대전과 후원전 등을 통해서도 지역 작가들의 수준 높은 미술작품 발표의 장으로서의 역할과 이미지도 견고하게 다져왔다. 지난 2022년 1월부터 2023년 5월까지 개관이래 처음으로 보다 나은 전시환경 구축을 위해 1년 5개월간 리모델링을 추진했고 2023년 5월 1일 재개관했다. ● 재도약을 준비해온 수성아트피아는 5월 2일(화) '재개관 기념 특별전' 『현대미술·빛을 찾아서』를 개최했다. 이 전시는 '재개관 기념 특별전'인 만큼 차별화된 작가 구성과 진행으로 미술애호가들과 시민들에게 보다 나은 미술작품 감상의 기회를 제공한다. 초대작가는 대구를 기반으로 왕성하게 창작활동을 하고 있는 현대미술작가 곽훈(1941년~), 남춘모(1961년~), 이명미(1950년~), 이배(1956년~), 최병소(1943년~)(가나다 순)5인이다. 특히 남춘모(1961년~), 이명미(1950년~), 이배(1956년~), 최병소(1943년~)작가는 대구에 거처를 두고 있으나 그동안 수성아트피아에서의 전시 경력이 전무해 시민들의 기대는 더 크다. ● 대구는 1974년 대구현대미술제가 한국에서 처음 열린 도시이다. 서울보다 1년 앞선 시점이다. 대구현대미술제는 1979년까지 이어지다가 1979년 7월 제5회를 마지막으로 막을 내렸다. 당시 주요 미술활동으로 손꼽히는 대구현대미술제는 당대 미술계를 반영한 모더니즘미술, 전위미술, 행위예술 등이 최초로 시도되거나 대규모로 시행되어 한국 미술계의 다양한 실험과 도전에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 정신이 2012년 10월 '강정 대구현대미술제'로 이어져 지금(2023년)까지 명맥을 유지하며 주목받고 있다. ● 이번 전시 초대작가 5인 중 이명미는 대구현대미술제 초대 멤버이며 최병소는 5회 연속 참여한 작가이다. 이번 전시 초대 작가들은 대구현대미술제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꾸준히 그 정신을 계승· 실천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나아가 이들 초대작가 5인은 국외로 활동범위를 넓혀 국제무대에서 작품성을 인정받거나 한류를 견인하고 있다는 점이 한국미술계의 자부심이라 할만하다. 「현대미술·빛을 찾아서」는 대구에 연고를 둔 이들 현대미술작가 5인의 작품세계를 미술사적 맥락에서 소개하고 연계학술행사를 통해 역사적 의의를 환기한다. ● 초대작가 5인은 활동의 꾸준함이 40~60년이라는 긴 세월을 차치하고라도 창작의 프로세스가 매우 혁신적이다. 매체에 대한 심층 분석은 물론 작업에 접근하는 방식이 진취적이면서도 진지하여 관람자들의 사유와 정신적 참여를 유도한다. 이들은 또한 익숙한 재료를 사용하지만 차별화된 가치관과 조형감각으로 심미적 체험을 가능하게 한다. 그것이 관람자를 다양한 질문으로 이끈다. 저마다 추구하는 예술세계는 다르지만 '붓질'을 유지하며 '빛'을 지향한다는 점이야말로 참여 작가 5인의 작업세계의 공통분모가 아닐까 한다. 빛은 곧 밝음이며 희망을 상징한다. 빛과 밝은 희망은 재개관하는 수성아트피아의 지향점과도 상통한다. ● '붓질'은 회화의 가장 기본적인 표현방식이다. 붓질은 출발임과 동시에 과거와 현재를 잇는 연결고리이다. 그림의 초석과도 같은 붓질이 서예나 한국화에서는 정신성을 동반한다. 이러한 붓질에는 공간성과 시간성이 내재한다. 작가의 사상과 정서, 미감 등과 같이 객관적인 잣대로 가늠하기 어려운 것들이 녹아 있는 붓질에서 작가의 정체성과 개성, 철학을 가늠하게 된다. 이번 전시 초대작가 5인이 추구하는 작업의 장르가 서예나 한국화는 아니지만 기저에 농밀한 붓질을 간과할 수 없다. 그러나 아무리 농익고 유려한 붓질이라도 '빛'이 없으면 그 의미는 무색해진다. ● 문화발전과 맞물려 의미가 다양하게 변한 빛을 신화는 중요하게 다룬다. 세상의 창조와 생명의 잉태를 은유하는 빛을 종교도 매우 중요한 위치에 둔다. 중세인들은 지성이 어떤 것을 분명하게 밝힐 때 그것을 정신적인 빛으로 간주했다. 철학에서는 물리적인 빛 외에도 정신과 형이상학적인 면을 포괄한다. 형이상학적인 빛은 신의 속성과 연결되며 동시에 인간의 지성을 비춘다. 인상파화가들은 카라바조나 램브란트와는 또 다른 방식으로 빛의 움직임에 주목했다. 화가들이 빛과 색의 관계를 캔버스 위에 펼쳐냈듯 미술사에서 빛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 예술이든 종교든 철학이든 빛은 늘 어둠과 공존한다는 것이 사실이다. 어둠이 없으면 빛은 존재할 수 없고 어둠이 있을 때만 빛의 밝음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빛과 어둠은 대결구도인 듯 상보적이며 공생관계이면서 서로를 의지한다. 음과 양이 공존하는 우주의 순환원리처럼 삶 전체를 둘러싸고 있는 빛과 어둠이지만 우리의 시각이 어디로 또는 무엇을 향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는 달라진다. 작가들은 다양한 경로를 통해 이러한 빛에서 힌트를 얻고 그 빛을 작업에 대입하거나 주관적으로 인용, 또는 차용한다. ● 이번 전시 초대작가 5인의 작품에서도 이러한 빛의 흔적은 역력하다. 곽훈 작가는 오픈식에 설치퍼포먼스를 통해 밝은 빛을 밝혔다. 현재 진행 중인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간 전쟁의 상흔을 직시한 작품으로 시민들의 염원 즉, 희망의 메시지를 담은 작품을 설치했다. 희망은 밝음을 향해있다. 그것은 빛과 맞닿아 있다. 최병소 작가는 오랜 세월 한결같이 검은색 흑연으로 신문지 위에 어둠(흑연)을 밀착시켜놓았지만 우리는 그 어둠을 뚫고 올라온 빛을 외면할 수 없다. 진지한 듯 명징하면서도 소신껏 다져진 흑연은 예술가 최병소의 고독한 예술여정을 반짝이는 빛으로 비추어낸다. 아이들의 놀이처럼 밝고 경쾌한 느낌의 이명미 작가 작품이야 말로 빛과 아주 밀접하다고 할 수 있다. 삶의 무게는 나이에 비례한다기보다 나이에 버금가는 무게를 온전히 내려놓아야만 삶이 빛을 발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작가는 자신의 내면을 밝은 빛깔의 색으로 풀어낸다. 이배 작가의 숯은 검지만 검다고만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깊고 아득한 빛(현玄)이 스며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작가는 농부가 밭을 갈아 경작을 하듯이 세상이치에 겸허하게 다가간다. 자연의 이치에 순응하며 존재에 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는 이배 작가는 작업으로 기본과 본질에 다가간다. 거기에서 우러난 빛은 한층 진중한 빛을 우려낸다. 경북 영양 두메산골이 고향인 남춘모 작가는 고향 마을 들녘 밭고랑과 이랑 사이에서 반짝이던 빛을 소환했다. 비닐에서 반짝이는 빛의 잔상을 차용한 남춘모 작가의 작품이야 말로 빛과 불가분한 관계이다. 반짝이는 빛은 희망이자 나아감이며 혁신이다. 이러한 빛의 속성은 현실을 직시하며 변화를 도모하는 현대미술의 단면과 맞닿는다. ● 초대작가 5인의 작품은 현대술이라는 카테고리 안에서 관람객들로 하여금 재창조와 추창조를 경험하게 한다. 작품이 단순히 아름다운 이미지로 치부되는 것이 아니라 그 저변에 깔린 성찰의 시간과 감성의 결이 동양적 울림으로 다가온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참여 작가들의 작품에서 보이는 주관적 호소가 객관적인 당위성을 획득하는 것은 동시대의 감정 유출과 소통의 미감을 적절하게 버무리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 다음은 전시연계 프로그램 학술행사다. 5월 2일 전시 오픈식에 앞서 수성아트피아 알토홀에서 학술행사 「대구 현대미술의 맥」을 개최한다. 「대구 현대미술의 맥」 개최는 현대미술이 범람하는 이 시대 '한국의 현대미술 동향'을 살피고 좁게는 '대구 현대미술의 흐름'을 정리하여 한국미술의 현주소 가늠 및 향방을 점쳐보는 기회가 될 것이다. 미술평론가 윤진섭(한국의 현대미술)과 오픈스페이스 배 아트디렉터인 윤규홍(대구의 현대미술), 그리고 미학박사 이달승(초대작가들의 작품세계)이 발제를, 미학박사 남인숙과 미술사학박사 김기수가 질의자로 참여한다. 이번 학술 행사는 전시의 연장선상에 있으며 단순히 작품 감상에만 그치는 전시가 아니라 학술행사를 통해 전시의 미술사적 의의와 그 문맥을 짚어 이해의 폭을 넓히는 계기로서 의미가 있다. ● 대구에서는 1995년 '대구현대미술가협회'가 발족되어 현재까지 270여명의 회원들이 왕성하게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1999년에는 비영리 연구단체 '대구미술비평연구회'가 발족되어 2018년까지 활동을 전개했다. 비평의 불모지나 다름없던 대구에서 지방 유일의 자생적 미술비평연구단체 '대구미술비평연구회'는 현장비평 등을 통해 대구미술의 분위기 쇄신을 선도했다. '74년 대구현대미술제' 개최에 이어 '대구현대미술가협회' 및 '대구미술비평연구회'의 활동은 작가 군과 이론가가 균형을 이룬 대구미술현장을 방증한다. 대구미술 발전의 견인차역할을 한 예는 그 밖에도 많다. 하루가 멀게 새로운 예술의 비전을 목격하고 있는 디지털시대에도 지역이라는 장벽은 중앙을 넘지 못한다. 지역작가들 상당수가 중앙을 동경하고 그들의 발길이 중앙으로 향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러한 시점에 『현대미술·빛을 찾아서』展이 대구지역의 현대미술의 저력을 전시를 통해 점검하고, 후진들에게 자긍심을 고취하는 자리가 되길 바란다. ■ 수성아트피아 전시기획팀

최병소_0191225 Untitled_신문, 볼펜, 연필_54×80×1cm_2019

최병소-어둠의 표정 ● 내가 길을 갈 때면 길은 나를 데려가고 있습니다. 어둠 속으로, 어둠 속으로 자신을 데려가고 있는 화가가 있습니다. 그렇게 어둠 속으로 자신을 데려가며 최병소는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라고. ●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는 그린다는 것과 지운다는 것이 서로 다르지 않은 하나 되기를 바라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흔히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어떤 다다름을 향하고 있지만, 그에게 그린다는 것은 끝나지 않는 끝날 수 없는 것에 자신을 맡긴다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한 끝나지 않는 끝날 수 없는 무한의 부름을 받아들일 때, 그는 더 이상 나를 말하거나 나를 내세울 권리를 내려놓습니다. 그에게 그린다는 것과 지운다는 것은 서로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리며 지우고 지우며 그리고 그렇게 끝나지 않는 끝날 수 없는 길을 가고 있습니다. 이 길에 이끌리며 이 길을 따르는 화가는 그렇다고 자신을 넘어 어떤 이상으로 나아가는 것도 아닙니다. 그에게 있어서 그린다는 것은 어떠한 의미에서는, 그는 더 이상 그 자신이 아니고 더 이상 어느 누구가 아니라는 사실에 닿아 있는 것 같습니다. ●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더 이상 어느 누구가 아닌, 그는 그에게 무지합니다. 모르면 침묵합니다. 그는 무지의 어둠 속에 침묵합니다. ● 어둠 속에 침묵하는 그는 침묵 속에 종이와 연필이 함께 사각거리며 어둠 속에 들려오는 어둠의 속삭임을 듣고 있습니다. 어둠의 속삭임을 들으며 침묵의 눈은 어둠 속으로 어둠 속으로 스스로를 데려갑니다. 어둠 속으로 어둠 속으로 자신을 데려가며 침묵의 눈은 어둠의 표정을 들여다봅니다. 어둠의 표정은 침묵으로 말합니다. 어둠의 표정은 침묵으로 말하는 침묵의 표정입니다. ● 그리고 지우며 헤지고 찢긴 종이 위에 맑고 깊은 어둠이 가득 내려앉았습니다. 맑고 깊은 어둠 속에 어둠의 표정이 침묵 속에 말하고 있습니다. 어둠이 숨기고 있는 어둠의 침묵의 표정이 마침내 검은 광물과도 같은 빛남으로 떠오르는 것을 그는 침묵 속에서 어둠 속에서 들여다보고 헤아려보고 있습니까? 이 빛남은 어디로부터 오고 있는 빛남입니까? ● 빛남(色)은 맑고 깊은 어둠(空)과 다르지 않더라(색불이공 色不異空). 그렇게 그는 길을 가고 있습니다. 어둠 속으로, 어둠 속으로 자신을 데려가고 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라고 말하며. 빛남은 침묵하는 무지의 저 맑고 깊은 어둠 속에 늘 새로이 오고 있습니까? 무지 속이 아니라면 '오고 있는 새로움'은 과연 어디서 밝아오고 있습니까? 무지가 드리우는 밤 속에 사람은 빛을 찾습니다. ● 빛은 늘 어둠 속에 오고 있습니다. 빛은 늘 어둠 속에 빛납니다.

이배_붓질 Brushstroke 11g_162×130cm_2023

이배-검음(玄)의 얼굴 ● 빛은 늘 어둠 속에 오고 있습니다. 빛은 늘 어둠 속에 빛납니다. 여명黎明은 늘 밤 깊은 어둠 속에 밝아오고 있습니다. 밤 깊은 어둠 속에서 밝아오는 여명이 사람의 눈에 빛과 어둠의 빛깔로 '풍경'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 "'맑은 어둠의 색(色), 검음(玄)' 위로 하얀(白) 빛이 솟구치며 번지니 하늘도 땅도 밝아오고..." ● 빛과 어둠은 다르지 않습니다. 이 배의 '풍경'(landscape)은 빛과 어둠이 함께 그려내는 근원根源의 풍경을 보여주고 있는 듯합니다. 우리는 화폭 위 검은 색과 흰색의 단순한 화면 분할에 따른 구성적 대비만을 보고 있지 않습니다. '맑은 어둠의 빛깔, 검음(玄)'과 '여명(黎明)의 빛깔, 하양(白)'이 서로 스며들기도 서로 겨루기도 하면서 고요함 속에 빛과 어둠의 파동을 빚어내고 있는 듯합니다. 그렇게 빛과 어둠은 짝을 맺고 있습니다. 화가의 눈은 빛과 어둠을 나누지 않습니다. 화가의 눈은 빛과 어둠을 색으로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 검음(玄)은 기원(起源)의 색입니다. 하양(白)은 여명(黎明)의 색입니다. 기원(起源)의 밤 속에서 여명(黎明)은 밝아옵니다. 빛은 늘 어둠 속에서 밝아옵니다. 빛을 빛이라 이름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빛은 밝음입니다. 밝음이 빛의 이유입니다. 화가는 빛을 말하기에 앞서 밝음을 눈으로 보려합니다. ● 화가의 눈은 빛 속에서만 밝음을 보지 않습니다. 화가의 눈은 어둠 속에서도 밝음을 보려합니다. 화가의 눈에 어둠은 어둠뿐인 어둠이 아닙니다. 마티스(Matisse)는 검은 색을 어둠의 색이 아닌 빛의 색처럼 보고 싶어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배는 검은 색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오히려 어둠 그 자체를 지켜보고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검은 숯의 어둠을, 어둠 속의 검음(玄)을... 어둠은 깊은 어둠일수록 맑은 어둠으로 나아갑니다. ● "검음이 더욱 검음으로 나아가니 모든 깊고 아름다운 비밀의 문이구나. 玄之又玄 衆妙之門" (노자 老子, 『도덕경 道德經』 중에서) ● 검은 숯의 어둠은, 그 어둠 속의 검음(玄)은 맑습니다. 검음이 더욱 검음으로 나아가는 그 검음 속에 빛은 밝아오고 있습니다. 화가의 눈은 그 검음 속에 깊고 아름답게 밝아오는 빛의 말을 눈으로 듣고 있습니까? '오고 있는 새로움'이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검음이 더욱 검음으로 나아가는 그 검음 속에 빛은 밝아오니, 빛이 없어도 밝더라고... ● 검음(玄) 속에 밝아오는 빛의 말은, 화가의 눈에 늘 은은하게 '비스듬한' 비밀스러운 시詩로 비치는, '검음(玄)의 얼굴'이 들려주는 말입니다. ● 이제 비스듬히 누인 그의 붓은 하얀 종이가 숨기고 있는 맑은 어둠 깊숙이 스며들고 배어들고 있습니다. 붓질의 결 따라 '검음(玄)의 얼굴'은 이제 다채로운 밝음의 표정으로 새롭게 밝아오고 있습니다.

이병미_흐린날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50×259cm_2011

이병미-놀이, 이 밝음의 속삭임 ● 내가 길을 갈 때면 길은 나를 데려가고 있습니다. 밝음 속으로, 밝음 속으로 자신을 데려가고 있는 화가가 있습니다. 이명미의 그림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밝음은 나의 놀이터라고. 내 마음에 옷을 입혀주고 날개를 달아주는 놀이터라고.' ● 놀이란 무엇입니까? 논다는 것은 놀이 속에 빠져들고 그 속으로 나를 데려간다는 뜻입니다. 자신을 데려가지 않고 놀 수는 없습니다. 놀이는 데려가는 곳이 있습니다. 놀이는 항상 자신을 밝음 속으로 데려가고 있습니다. 그림을 그리며 그는 스스로 밝음의 속삭임을 듣고 있는 것 같습니다. ● 밝음의 속삭임은 어디서 오고 있는 것입니까? 그에게 밝음의 속삭임은 색色으로부터 오고 있습니다. 이 말은 그가 밝은 색만을 즐겨 쓴다는 뜻은 아닙니다. 밝음을 어둠의 반대말로 들으면 우리는 놀이에서 오는 밝음의 속삭임을 지나치게 되고 색이 들려주는 밝음의 속삭임을 놓치기 쉽습니다. 화가는 밝은 색 어두운 색을 나누지 않습니다. 화가의 눈에 모든 색은 빛깔로 비치니, 모든 빛깔은 순수합니다. 그래서 모든 빛깔은 맑고 또 밝습니다. 검은 빛이든 하얀 빛이든 붉은 빛이든 노란 빛이든 청록 빛이든 빛바랜 갈색이든 모든 빛깔에는 맑음 위로 밝음의 속삭임이 들려옵니다. 그의 '야간 비행'처럼 그의 '놀이-별 그리기'처럼 밤의 맑은 어둠 속에서도 밝음의 속삭임은 들려오고 있습니다. ● 그의 색의 놀이는 늘 그를 밝음으로 이끌고 그를 밝게 미소 짓게 합니다. 놀이 속에는, 화가의 색의 놀이 속에는 사람들이 미처 눈치 채지 못하고 있는 법(法)이 숨어있습니까? 밝음의 속삭임을 들려주는 것이 법의 그윽한 마음입니다. 놀이는 늘 밝음으로 이끌고 생명에 미소를 안겨주고 있습니다. 놀이는 생명을 가두지 않고 잃어버린 삶의 미소를 밝음으로 되찾게 해줍니다. 색의 놀이는, 놀이 속의 색은 밝음의 속삭임을 안겨줍니다. 밝음의 속삭임을 안겨주며 생명을 미소 짓게 하는 것이 아름다운 법(法)의 마음입니다. ● 생명에게 미소를 안겨주는 밝음의 속삭임이 무엇입니까? 사랑이 들려주는 밝음의 속삭임이 그러합니까? 법이 안겨주는 밝음의 속삭임도 색이 안겨주는 밝음의 속삭임도 사랑이 들려주는 밝음의 속삭임입니다. ● 무슨 연유로 그는 화폭 위에 '사랑' 이 말을 아이들처럼 색으로 글자로 칠하고 적고 또 노래합니까? 밝음이 무엇입니까? 아이들이 재잘거리고 떠드는 소리처럼 '밝아오는 밝음'을 밝음이라 이름 합니다. 맑은 어둠 위로 새롭게 떠오르는 빛나는 사랑의 속삭임처럼...

남춘모_Stroke-lines 2011_260×194cm_2022

남춘모-밭고랑의 미소 ● 내가 길을 갈 때면 길은 나를 데려가고 있습니다. 온기溫氣 속으로, 온기 속으로 자신을 데려가고 있는 화가가 있습니다. 남춘모는 잊지 않고 있습니다. 그가 붓을 들었을 때의 소망所望을. "아지랑이와 같은 향기"가 가슴 속에 번지는 작품을 그리고 싶다고 그는 말하였습니다. 가슴 속에 번지는 "아지랑이와 같은 향기"를 화가의 눈은 무엇으로 만나게 되는 것일까요? ● 그의 곁을 떠나지 않고 "아지랑이와 같은 향기"처럼 늘 그를 감돌며 에워싸고 있는 색이 있다면 아마도 미색迷色이 아닐까 짐작해봅니다. 미색은 온기의 색입니다. 미색은 이 땅이 가장 필요로 하는 온기를 담고 있는 빛깔입니다. 그래서입니까? 겨울날 들녘의 빛깔이 그러합니다. 겨울날 들녘의 마른 풀과 마른 짚이 포근하게 느껴지는 것은 미색이라는 온기의 빛깔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겨울날 들녘을 빛의 온기로 물들이는 미색은 이 땅의 '아지랑이와도 같은' 미소를 잃지 않는 희망의 색입니다. '아지랑이와도 같은' 희망의 색, 미색을 벗 삼아 밭 삼아 그는 그의 화폭에 고랑을 일구기 시작했습니다. ● 밭을 갈아 고랑을 일구니 두둑(진畛)이 생겨납니다. 두둑이 생겨나니 고랑은 골로 깊어지듯 어둠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두둑은 무릇 빛을 향하며 밝음 속에 머무릅니다. 그렇게 밭의 두둑과 고랑이 그리는 온기 가득한 빛과 그림자의 풍경 속에 언제가 찾아 올 그의 작품이 숨어 있었습니까? ● 풍경이 무엇입니까? 풍경風景은 우리의 눈길을 '일깨우는'(風) '빛과 그림자'(景)입니다. 미색이 일깨우는 희망의 빛이 무엇입니까? 희망의 빛은 언제나 짙게 드리운 어둠 위로 밝아오고 있습니다. 희망의 빛은 마침내 그의 화폭에서 밝은 미색의 두둑과 어두운 검은 색 고랑 사이를 오가며 감돌고 있는 것 같습니다. 밭의 질서가 화폭의 질서 되어 그의 작업에 흘러들기라도 하였습니까? 밭의 고랑은 농부의 발걸음이 끊이질 않는 수고로운 어둠의 길이요, 밭의 두둑은 농부의 발자국 소리 들으며 작물이 커가는 밝음의 길입니다. ● 그는 화면에 길을 내는 붓질과 밭을 일구는 쟁기질을 다르게 보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듯 그는 밭고랑을 일구듯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수고로움의 어둠은 밝음의 언약과 다르지 않아 함께 길을 열어갑니다. 밭고랑을 일구는 쟁기질은 같은 밭을 늘 새롭게 하여 '오고 있는 새로움'을 맞이하기 위함입니다. 붓질 또한 같은 화폭을 늘 새롭게 하여 '오고 있는 새로움'을 맞이하기 위함입니다. ● 붓질도 쟁기질도 다르지 않으니, 화가의 붓질은 구태여 밭고랑을 앞세우지 않습니다. "아지랑이와 같은 향기"가 번지는 온기 속으로 자신을 데려가는 붓질 속에서, 나도 모르게 '되찾은' 고향의 풍경이 밭고랑입니다. 그렇다면 회화는 원래가 고향 가는 길입니까? 그렇게 '오고 있는 새로움'마냥 화폭 속에서 '되찾은' 미소 짓는 밭고랑의 느낌이, 가슴 속에 번지는 밝음이 새롭게 열리는 회화의 길로 그를 데려가고 있습니다. 떠나온 고향이 화가의 눈을 깨웁니다. 회화는 원래가 고향 가는 길이라고... 화가의 눈을 반기는 회화라는 이름의 고향 가는 길이라고...

곽훈_Halaayt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2022

곽훈-생명의 그릇 ● 내가 길을 갈 때면 길은 나를 데려가고 있습니다. 고향 속으로, 고향 속으로 자신을 데려가고 있는 화가가 있습니다. 고향을 떠나서도 저 멀리서 들려오는 고향의 부름을 잃지 않은 화가가 있습니다. 고향의 부름은 멀리 떠날수록 그 부름의 울림이 한층 더 깊고 크게만 들려오고 있는가요? 곽훈에게 고향의 부름은 고향 땅의 흙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고향 땅의 흙 속에서 되찾은 흙으로 빚은 옛 그릇이 있었습니다. 그 그릇을 잊지 못하는 눈의 기억이, 고향 떠난 화가로서 그가 "믿을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습니다. ● 깊고 맑은 어둠 속에서 떠오르는 듯한 황토 빛으로 빛나는 그의 찻잔(다완茶碗)은 고향 땅의 모든 것을 담아내는 그릇이 되었습니다. 모든 것을 담아내는 그릇은 모든 것이 흘러나오는 그릇이기도 합니까? 찻잔은, 맑고 깊은 어둠 속에서 푸르른 생각이 푸르른 '물'처럼 '쏟아지는', 맑고 깊어 푸르른 샘과도 같은, 그의 정신의 고향이기도 합니까? 생각의 샘과도 같은 그의 찻잔은 고향 땅의 흙 속에서 만난 그릇이었습니다. 짙은 흙빛 어둠 속에서 황토 빛으로 모습을 드러냈던 그릇. 그 그릇은 이렇게 고향 떠난 그에게 생각의 푸르른 샘과도 같은 정신의 고향이 되었습니다. ● 모든 것을 담아내는 그릇은 고향 땅과도 같은 품이라면, 모든 것이 흘러나오는 그릇은 생각의 샘과도 같은 요람이겠지요. 그에게 찻잔은 품이요 요람이었습니다. 이렇게 찻잔은 그의 회화의 시작을 알리는 생명의 그릇이 되었습니다. ● 우리가 그의 그림을 이름 할 수 있다면 '생명의 그릇으로서의 회화'라 말하겠습니다. 생명의 그릇을 일컬어 토양土壤이라 부릅니다. 그의 그림에 비치는 색은 많은 경우 우리가 몸 담고 있는 어둠이 드리운 땅, 토양을 일깨우고 있는 듯합니다. 이를테면 생명의 씨앗은 어둠이 드리운 토양으로부터 움트고 있겠지요. 꽃피운 튜립보다는, 튜립이 몸 담고 있는 토양을... 내 눈앞의 튜립보다는, '오고 있는 새로움'으로서의 튜립을 안아주고 키워주는 튜립의 품과 고향을 그는 함께 노래하고 싶었습니까? 화가의 눈은 놀라울 따름입니다. 가령 찻잔에서 '쏟아지는 물'을 그는 '소리'로 듣고 있습니까? 생명의 그릇에서 들려오는 '희망의 속삭임'으로... ● 그는 그림 속에서 겁劫을 말하고 기氣를 말하였습니다. 겁劫이 무엇입니까? 겁劫은 사람에게 가장 긴 시간을 뜻합니다. 겁劫은 사람에게 무한의 시간을 말합니다. 화가의 눈은 고요함 속에서 사람에게 가장 긴 시간, '무한의 시간'을 보려합니다. 사람에게 가장 긴 시간은 기다림의 시간입니다. 기다림의 시간은 친밀함의 시간이기도 합니다. 겁劫 이 '무한의 시간'이 막연한 관념 속의 시간인 것은 아닙니다. 기원하는 마음속의 기다림도 친밀함의 시간이요, 부지런함 속의 기다림도 친밀함의 시간입니다. 기다림 속의 친밀한 시간 속에 '무한의 시간' 겁劫은 마침내 씨앗이 싹을 돋는 기氣로 찾아듭니다. ● 기氣란 무엇입니까? 기氣란 나를 북돋는 생명의 기운, 애정을 일컫습니다. 생명의 그릇에서 들려오는 '희망의 속삭임'이 다름 아닌 기氣입니다. 겁劫은 생명의 그릇 속에 담겨 있는 '무한의 시간'을 말합니다. 기氣는 생명의 그릇 속에 들려오는 애정 어린 '희망의 속삭임'을 말합니다. '무한의 시간' 속의 '희망의 속삭임'이 그를 고향 속으로, '생명의 그릇' 가운데 '오고 있는 새로움' 속으로 그를 데려갑니다. ■ 이달승

전시연계 학술세미나 「대구 현대미술의 맥」 - 일시: 2023_0502_화요일_04:00pm_알토홀 - 발제자   윤진섭(미술평론가-한국 현대미술),   윤규홍(오픈스페이스 아트디렉터-대구 현대미술),   이달승(미학박사-초대작가 5인의 작품세계) - 질의자: 김기수(철학박사), 남인숙(미학박사) * 자료집 발간

Vol.20230507a | 현대미술·빛을 찾아서展

@ 우민아트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