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의 점

송유진_우주언_김근정展   2023_0612 ▶ 2023_0619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후원 / 제주특별자치도_제주문화예술재단

관람시간 / 11:00am~06:00pm 전시관람 사전예약(필수) / Tel. +82.(0)507.1347.8104

아트스페이스 빈공간 ART SPACE BINGONGGAN 제주도 제주시 관덕로3길 15 (삼도이동 1053-11번지) 1층 Tel. +82.(0)507.1347.8104 @biniartspace

김포에서 남서쪽으로 한 시간 정도를 날아가다 보면 만나게 되는 섬이 있다. 이 문장만으로도 당신은 이곳이 어디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름을 공개하기 앞서 나는 먼저 비행기 안에서 이 섬을 전체적으로 조망한 경험이 있는지를 묻고 싶다. 그러기란 쉽지 않은데, 높은 고도에서는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다가 고도가 낮아져 착륙할 때 쯤이 되면 벌써 땅의 일부만이 시야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지도나 인공위성 사진을 통해서야 그것의 전체를보게 된다. 이는 가로로 긴 점의 형태를 띠고 있다. 점 같은 섬. 섬 같은 점. 이는 바로 제주다. ● 발견 이래 지금까지 제주는 온전한 본연의 모습으로 수용되기를 기다려 왔다. 그러나 원경과 근경, 포착 불가능성과 아웃포커싱이라는 양단의 딜레마 속, 그에 전제되는 적당한 거리 확보는 성취된 전력을 찾아보기 어렵다. 이제제주의 깊숙한 곳까지 들어오게 된 육지인들은 각자의 이상향과 실재가 합치되는 지점을 찾아 나서기에 여념이 없지만, 섬 내부에서 약동하는 '실제'의 삶에는 도통 관심을 두지 않는다. 이들은 자신이 목격한 단편적 광경이 제주의 진실한 모습을 담고 있다고 믿을 뿐, 필터를 끼우지 않은 제주의 실상에 관해서는 외면을 택한다. 그 결과 극단적인 확대와 누락을 거쳐 재편된 제주는 미디어가 선택한 장면만을 제공하는 허구의 장소가 된다.1) ● 하나의 섬을 향한 이중적 태도의 끝은 관광개발을 명분으로 제주의 토착문화를 신비화했던, 그것을 실존하는 섬이 아닌 하나의 신화적 상징으로 여겼던, 그리고 이데올기적 프레임을 씌워 도민들을 탄압했던 무수한 오해와 비극의 역사적 순간들로 향한다. 일일이 설명하지는 않겠지만, 이러한 과거의 사건들을 복기하는 것은 제주가 겪어 온 타자화의 흐름을 인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 육지가 이룩한 발전을 실현할 수 있는 또 다른 장소인 동시에 육지성이 결여된 지역으로 '상상'되었던 제주.2) 그리고 이 모든 조작의 기저에 자리한 근대의 욕망. 그것은 당시에서 멈추지 않고 동시대로까지 흘러들어와 섬의 응시를 거두어 간다. 외부의 시선이 내부의 시선을 압도해버리는 이때, 섬은 침묵을 강요당한다. 이는 육지가 아닌 섬, 면이 아닌 점의 운명이다. 다만 점은 이따금 운명에 거부하듯 희미하게 깜박거리며 신호를 보낸다. 『가상의 점』의 작가들은 이 어긋난 신호를 포착하고, 그것이 임시로 발화될 수 있는 토대로서 각자의 작업을 선보인다.

송유진_사건일지 2021.11.03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1×116.8cm_2023

송유진은 2021년 무렵부터 제주에서 거행되었던 야자수 이식 사업에서 출발한 회화 신작을 전시한다. 관광도시 이미지의 구축을 위해 1980년대부터 90년대에 걸쳐 도심 곳곳에 심긴 야자수는 제주의 이국적인 풍광을 연출하는데 주요한 몫을 담당했다. 그러나 40여 년이 흐른 오늘날, 그것은 안전사고 유발을 이유로 순차적으로 퇴출당하는 중이다. 중앙정책에 의해 들여온 야자수가 다시 중앙정책에 의해 제거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은 정책의 불안정성은 물론 늘 '중앙'에 종속될 수밖에 없는 제주의 '지역'적 지위를 보여준다. 중앙에서 새로운 과제가 주어질 때마다 그에 맞춰 변화하는 제주의 모습을 내부에서는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제주에서 나고 자란 작가는 이를 '머릿속 지도와 내 발이 닿는곳이 하나도 동일하지 않을 때'의 경험에 비유하며 도민인 자신도 익숙해지기 어려운 낯섦이 제주에 산재하고 있음을 고백한다.3) 그와 함께 성장했던 야자수의 추방은 또 하나의 낯섦으로 머무르며 다음의 작업을 촉발한다. ● 「사건일지 2021.11.03」(2023)는 의인화된 야자수의 살해 현장을 그린다. 뿌리 뽑힌 야자수를 촬영한 보도 기사 사진이 작업의 발단이 되었다. 도로 위에 쓰러져 있던 야자수는 마치 누군가에 의해 습격당한 듯한 모습으로 작가의 눈앞에 나타났고, 그는 이를 마치 형사의 사건일지에서 볼 법한 구도로 편집해 범인이 누구인지에 대한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이 사건에서 야자수는 '제주를 대표하는 나무'에서 '유해종'으로 폄하되는 시점에서 한 번, 기후 위기로 인해 잦아진 태풍으로 실질적인 죽음을 맞이하는 시점에서 한 번. 총 두 번을 잔혹하게 살해당한다. 야자수가 쓰러져 있는 배경은 마치 연극무대처럼 어두컴컴한데, 이는 그것이 심겼던 제주 역시 모종의 목적을 위해 연출된 공간일 수 있다는 의심을 불러일으킨다. 「비 오는 날의 이사」(2023)에서는 호명된 정체성의 불순함이 더욱 본격화되어 드러난다. 작가는 외래종이지만 국내의 것처럼 친숙하게 여겨져 온 야자수와, 그 반대로 본래 우리나라에서 개발되었지만 중국의 것으로 종종 오해받는 짜장면을 연동시킨다. 둘의 접점에는 권력의 정책적 아젠다가 자리한다. 야자수가 8-90년대 관광정책의 일환으로 심어졌다면, 짜장면은 6-70년대 정부가 밀가루 소비 증대를 위해 펼친 분식장려정책에 힘입어 대중화되었다. 식사 여건을 제대로 갖출 수 없는 이삿날 다른 음식이 아닌 짜장면을 먹게 된 계기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처럼 현실에서 자연스럽게 인식되는 대상의 의미는 실은 정교하게 짜인 정치적 맥락에 의해 확립된 것이다. 야자수 잎이 점차 짜장면으로 변해가듯, 수많은 이름이 임의로 덧붙여지는 과정에서 대상은 본래의 모습을 잃고 혼성성을 띠게 된다.

우주언_둘나섬의 짧은 역사_단채널 영상, 사운드, 혼합재료_가변크기_2023

우주언은 언어의 비중립성에 착안해 타자를 언어로 명명하고 정의하는 행위에 내포된 권력의 이행방식에 집중해 왔다.4) 이번 전시에서 그는 제주라는 장소에 대한 비본질적 태도가 언어와 이미지를 통해 드러나는 지점을 짚는다. 「둘나섬의 짧은 역사」(2023)은 스톡 영상과 작가의 촬영본으로 구성된 페이크 다큐멘터리다. 그가 직조해 낸 인공의 플 롯에서 제주는 둘나섬 ' '이라는 가상의 섬에 비유되고, 관객은 이 관념의 공간을 경유해 실제의 공간으로 향한다. 이는 실존의 여부를 떠나, 외부의 시선에 의해 가공된 정체성을 보유한다는 점에서는 두 섬이 다를 바 없다는 해석으로부터 비롯된다. 이때 전경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두 섬(현실)의 가교로 볼 수 있다. 흙, 모래, 열대과일 등 제주에서 구한 자연물과 제주 외부에서 구한 여러 인공물의 혼합은 가상과 실재의 섞임을 물질적으로 형상화한다. ● '이름이 없음' 혹은 '이름이 수없이 많음'을 뜻하는 '둘나'의 의미를 언급하며 시작되는 내레이션은 역대 둘나섬의 이름들과 그 유래를 더듬어나간다. 둘나섬을 지칭했던 '백조도', '자애도', '여인도' 등의 이름은 '탐라국', '삼다도', '감귤국'을 거쳐 최근 '힐링의 섬'에 이르기까지 제주를 스쳐 간 수많은 이름을 상기시킨다. 한편, 빈번한 이름의 변화에서 알 수 있듯 육지가 섬을 대하는 태도는 늘 비일관적이었다. 그리고 끝내 그것은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는 장소로 섬을 택하기에 이른다. '스란코인', '가리뭇 에멀전', '둘둘나나 국수'와 같은 상품들의 등장은 그 결과에 해당한다. 본토인들에 의해 '발견'된 이 상품들은 스스로는 가치를 생성하지 못하고 외부의 승인에 의해 작동하는 섬의 실정을 보여준다. 동시에 그것은 한때 국내에서 발생했던 소비 신드롬으로 연결되며 대중매체, 대기업이 창조해 낸 환상의 이미지들이 비단 섬 뿐만이 아니라 현실의 다양한 영역에서 실체를 은폐하는 기능을 수행하고 있음을 고발한다. 이 '환상의 이미지'의 전형이라 할 수 있는 것은 영상을 이루는 낱개의 신(scene)들이다. 제주, 코타키나발루, 베니스 등지에서 촬영된 이들은 여행상품 홍보물에서 볼 법한 평온한 분위기와 이국적인 색감으로 이루어져 있다. 비록 섬의 표면을 떠낸 것에 불과하지만, 우리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이들을 종합하여 각자의 사고 속에서 둘나섬을 구축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둘나섬은 언제든 부서질 수 있는 유약한 껍데기이자 더없이 공허한 이름이다. 역사의 나열일 뿐인 내레이션과 신비롭게 포장된 이미지들의 틈 사이로 미끄러지는 둘나섬, 혹은 제주, 혹은 바다 남쪽 어딘가의 '그 섬'은 영영 본질을 드러내지 못한 채 다음 차례의 호명을 기다리는 수동적인 존재로 남는다.

김근정_제주 자연환경 콜라주_섬유에 인쇄된 사진, 아크릴판, 나사 못_118.9×84.1×0.5cm_2023_부분

김근정은 제주가 아닌 지역에서 발견한 제주의 모습을 사진으로 기록한 「제주 자연환경 콜라주」(2023)를 통해 풍경이 보존하는 감각에 대한 실험을 전개한다. 그는 직접 방문하지 않은 상태에서 주변의 경험담과 매체에 의해 노출되는 이미지들만으로 제주를 인식하는데, 이는 앞서 지속적으로 언급되었던 추상적, 선험적 모델로서의 제주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대목이다. '제주'라는 상상의 세계는 이야기와 이미지들의 누적으로 형성되어 작가의 관념 안에 자리한다. 그러면서도 이는 통상적인 의미의 이미지와는 다른 층위에 놓인다. 보통의 이미지가 물질적인 성질을 띤다면 그것은 물리적 기반에서 벗어나 온전한 의식의 지층에 자리하는 것이다.5) 따라서, 제주를 닮은 어느 풍경을 사진으로 남기는 행위는 비실재화된 제주의 자리를 그와 유사한 물질인 이미지로 채우려는 시도이면서 그것이 이미지가 아니고서는 달리 재현될 도리가 없음을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일이기도 하다. ● 작가는 지형, 물, 바람, 열대식물과 같은 자연물에서 제주의 표상을 찾는다. 그가 설정한 '제주적 풍경'의 기준은 「제주 자연환경 콜라주」(2023)를 구성하는 이미지들에서 직관적으로 드러난다. 유사-콜라주 형식의 작품은 니스를 비롯한 프랑스의 몇몇 소도시, 서울, 강화도에서 촬영된 자연의 이미지 중 제주와 조우하는 듯한 시감각적 체험을 일으키는 것들의 병치로 이루어진다. 본래 이들을 분별하는 근거가 되었던 시공간적 격차는 개별 프레임 안에서 불명확해지는데, 이것의 주된 이유는 다름 아닌 카메라의 촬영 방식에 있다. 전체적인 풍경이 아닌 이를 이루고 있는 개별 요소, 심지어는 그 요소의 일부만을 확대 포착함으로써 대상의 구체적인 정체성이 삭제되는 것이다. 나아가, 작가는 이미지들의 물성적 구현을 일치시키는, 즉 이들의 질감을 균질하게 다듬는 작업을 통해 이러한 혼동을 가중한다. 이렇게 완성된 「제주 자연환경 콜라주」은 최종적으로 실제 제주의 풍경 안에 들어가 놓인다. 이미지들에 대한 아무런 정보가 주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둘을 분간하기란 가능한 것일까. 예민한 관객이라면 단번에 알 수 있겠지만, 일반 관객들이 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미지에 균열을 낼 만큼의 끈질긴 응시와 의심이 필요하다. 옮기기 바빴던 시선을 잠시 고정하고 미세한 균열에 신경을 집중해 보자. 그 틈새로 보이는 것은 말 그대로 '풍경 저편에 보존된 내밀한 감각'이다. 이 감각은 사진이 대상을 늘 투명하게 보여줄 것이라는 허황된 믿음을 중지시킨다. 사진의 변치 않는 존재론으로 우리는 이따금 '세계의 파편'을 이야기하지만, 늘 간과되는 것은 세계가 가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망막에 떠도는 이미지들을 경계하고 눈으로 관측할 수 없는 것 들에 기민하게 반응할 필요가 있다. 그리하여 파편이 불러오는 세계의 깊이를 자각하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제주 자연환경 콜라주」의 빈틈을 딛고 제주에 진정한 첫발을 내디딜 수 있을 것이다. ● 그간 공백으로 남아있던 '가상의 점'을 새로이 건설하고자 작가들이 택한 전략은 그 역시 하나의 점이 되는 것이다. 이들은 각자가 점유한 도민(송유진), 이주자(우주언), 외부인(김근정)의 위치를 일종의 좌표로 상정하고, 상호 조정과 연결을 통해 새로운 궤적을 만들어낸다. 중심과 주변으로 나뉘지 않는 이 지대에서 편향된 응시는 균형을 되찾고, 불확실한 주체들의 제약 없는 움직임은 서로를 향해 뻗어나간다. 전시는 마지막으로 이 느슨한 안무로의 동참을 제안한다. 자신과 상대의 거리를 가늠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하는, 모든 좌표들을 수평적으로 연결하는 재생의 안무. 하나의 좌표가 더해질 때, 하나의 장면이 더해진다. 섬은 예전부터 이러한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비어있던 시간만큼 더 무겁게 채워지기 위해. 그리하여 모든 시선을 무력화하는 어떠한 장면과 끝내 마주할 수만 있다면. ■ 임현영

* 각주 1) 김동현, 『제주, 우리 안의 식민지』(서울: 글누림, 2016), 270. 2) 같은 책, 121-122. 3) 송유진 작가 노트에서 발췌 4) 우주언 작가 노트에서 발췌 5) 이러한 서술에 있어 필자는 사르트르의 이미지론을 따르고 있음을 밝힌다.

Vol.20230612b | 가상의 점展

@ 우민아트센터